■ 의병장 양달사 <3>
영암지역 을묘왜변 때 종9품의 권관진(權官陳)에 배속된 군인은 40명

조정의 긴급조치

영암의 달량진에 왜구가 침입하여 달량성이 포위되고, 성이 함락되었다고 조정에 알려온 것은 명종 10년 5월 18일 전라도관찰사 김주(金澍)의 보고에 의해서였다. 김주 관찰사가 조정에 낸 보고서는 이덕견 영암군수의 보고서를 근간으로 작성되었다. 전라관찰사 김주의 보고는 현지 사정에 어두웠고 사태를 안이하게 보고 있던 조정에 커다란 충격이었다.

영암읍성을 중심으로 한 영암읍의 옛 지도와 영암읍성의 흔적.

조정에서는 전라도에 있는 병력만으로는 왜구의 격퇴가 불가능하다는 판단과 왜구침입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하여 명종은 즉시 비변사(備邊司:조선 중종 때 설치한 군국(軍國)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 당상 이상의 조신(朝臣)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비변사에서는 군율(軍律)을 엄격히 시행해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반면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는 이 무렵 가뭄으로 인해 주민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특히 해안지방의 주민들은 기아에 견디지 못하여 흩어진 상황에서 왜란은 당연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해안의 방어는 충분한 군량이 있어야 가능한데 지금은 군량이 바닥이 난 상태라는 것이다. 도(道)의 양민(良民)들은 군역을 기피하여 자진 천민(賤民)에 속하여 군역의 징집도 어렵고 군졸도 기아에 허덕여 엄격한 군율도 소용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홍문관에서는 두 가지 안을 종합하여 서울의 금군(禁軍) 500여명과 기타 80여명의 정병을 전라도에 급파하고, 서울의 군사적 공백을 메꾸기 위한 대비책으로 아직 출정하지 않은 군사는 잔류하게 하여 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전라도순찰사, 김경석을 우도방어사, 남치근을 좌도방어사로 임명하여 왜구 토벌에 나섰다.

또 조광원을 경상도순찰사, 조안국을 좌도방어사, 윤선지를 우도방어사, 장세호를 충청도 방어사로 각각 임명하고 조안국을 전라병마절도사로 임명하여 우도방어사 김경석과 좌도방어사 남치근의 뒤를 이어 전라도에 급파하였다.

그러나 전라방어사 김경석은 서울의 금군(禁軍) 500여명을 지휘하여 현지 영암에 도착하였으나 영암읍성에 머물면서 사태를 지켜보기만 하고, 전주부윤 이윤경이 싸움에 나서기를 요청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때 영암 군민들은 방어사가 온다는 소식에 안도하였으나 도착한 우도방어사 김경석은 싸울 생각은 않고 자신의 안위에 몰두하자 불안하고 분개에 해있던 상황에서 의병장 양달사가 입성하였다.

이로써 영암군민들은 양달사의 의병모집에 응하여 의병과 관군이 합세하여 전투를 시작하였고, 관군은 전주부윤 이윤경의 지시에 따라 왜구와 결전하였다.

영암군수의 허위보고

전라도관찰사 김주가 정부에 보고한 달량진 전투상황은 달량에서 싸우다 왜구에게 항복하고 영암으로 돌아온 영암군수 이덕견의 허위진술이 토대가 되어 작성되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는 해남현감 변협이 충순위(忠順衛) 임현령에게 관찰사의 달량진 전투상황과 왜구의 남해 침입 과정을 보고함으로써 대책을 세우는데 참고가 되도록 알려주는 과정에서 밝혀졌는데 임현령이 직접 상경하여 조정에 보고하여 알려졌다. 그 보고 내용은 변협은 달량진의 포위소식을 듣고 무장현감을 지낸 이남과 300여명의 군대를 인솔하여 성 밖에서 접전하였으나 패하여 이남(李楠)은 전사하고 변협은 거의 단신으로 살아났다.

우도수사 김빈과 진도군수 최린의 패배를 알지 못하고 어란진에서 달량진을 지원하였으나 역시 패하였다. 뒤에 알려진 일이지만 김빈은 수군 출동을 여러 가지 구실로 늦추다 마지못해 출전하였고, 접전하여 정병을 대부분 잃고 군기마저 적에게 빼앗겼으나 허위보고를 하였다.

영암읍성(邑城)과 치안 

고려 말 연안지역은 극심한 왜구의 침입으로 읍치(邑治)가 이설(移設)되거나 아예 폐지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연해지역 주민은 유랑(流浪) 생활을 하게 되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변의 비옥한 토지는 방치되고, 어염(魚鹽)의 수익도 감소되어 국가적으로 막대한 손실이 되고 있었다.

이처럼 국경지대의 군사적 불안성은 사회문제를 야기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문제의 해결방안 중 하나로 읍성축조가 대두되었다. 읍성은 이러한 국방상의 이유로 고려 말 조선조 초에 대부분 축조되었는데, 고려 말 전라도에 축조된 읍성은 전주읍성과 장흥읍성으로 나타난다. 영암읍성의 경우는 금성일기(金城日記)에 “의금부도사 전 선무랑 사헌감찰 민건(閔謇)이 도내 영암과 만경 축성형지심검과 영암성자에 대한 계문을 올리지 않고 성을 쌓지 않는 것에 대한 사연을 추고하는 일 및 부역 군인 중에 먼저 도망가자고 한 사람과 역군을 통솔하는 패두(牌頭: 인부 열 명의 우두머리) 통주(統主) 등을 추고하는 일로 2월 12일 나주에 왔다.”는 내용으로 보아 처음 축성한 것이 세종조로 확인된다.

이후 영암읍성의 규모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문종 대이며, 당시 도체찰사 정분(鄭芬)이 하삼도의 읍성을 살피고, 문종에게 보고하는데 둘레길이 4.369척(尺), 평지높이 12척(尺), 고험(高險)처 9척, 여장(女墻,성가퀴) 높이 3척, 적대(敵臺) 6개, 문은 3개인데 옹성이 없으며, 여장길이 639척, 샘이 둘이고, 해자는 당시까지는 파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이 석성(石城)이고 둘레가 4.369척인데 이는 시굴조사 결과와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길이는 2.010m이며, 높이 15척, 성안에 우물이 4개가 있는 것으로 전한다.

영암읍성의 건축물은 객사(客舍), 작청(作廳), 군기고(軍器庫), 동헌(東軒), 군사(郡司), 내아(內衙), 장청(將廳), 적청(賊廳), 대월루(對月樓), 훈련청(訓鍊廳), 옥(獄), 사창(司倉)이 있었다.

영암은 고려 성종 때 낭주로 승격되면서 전국 5개 도호부의 하나인 안남도호부가 설치되었으나 23년 후 전주로 이전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종 때 군사체제가 정비되면서 지방군에는 보병인 수성군과 수군인 기선군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영암지역 호구와 군인의정원은 333호에 1천229명이며, 군은 시위군 25명, 선군 670명, 영진군 155명, 역 1개소, 봉수 2개소가 설치되었다. 이때는 종4품의 만호가 배치되었으나 이후 군 체제가 개편되어 을묘왜변 때는 종9품의 권관진(權官陳:조선시대 변방을 지키던 종9품의 가장 낮은 군사조직 단위)에 배속된 군인은 40명에 불과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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