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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봉에 이어 구정봉 제사 전통 확인■ 월출산 구정봉 도자 파편 발견의 의미
고려 청자 ~ 조선 백자 등 도자파편 다양
영암향교 ‘오례의’ 기우제 축문기록 재확인
6개의 ‘납구슬’ 정체는 풍수와 연관 가능성

구정봉에서 이뤄진 기우제

영암문화원이 이번에 월출산 구정봉에서 벌인 지표조사 결과 발견된 도자 파편 등 유물들은 고려시대 제작된 청자, 조선초기의 분청자, 그리고 조선 중후기의 백자까지 다양한데다 높은 산악지대에서 발견된 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거 산행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구정봉까지 그릇을 운반해왔다는 것은 특별한 제사의식을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특히 천황봉(809m)과 향로봉(744m)에 이어 구정봉(738m)은 제3봉 임에도 불구하고 기우제 장소로 선택된 것은 월출산 제1봉의 위상을 확인해주고 있다.

또한 영암향교 ‘오예의’(五禮儀)에 수록된 ‘구정봉 기우제 축문’의 기록이 지난해 11월 열린 포럼에서 처음 확인됐는데, 이번 구정봉 지표조사에서 도자 파편 등 유물로 재확인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九井峯 祈雨祭 祝文
巖巖月斗 赫赫厥靈 蓄池雲雨 施澤洋洋 神其格報 人所景仰 愧余不德 作吏玆土 才乏治郡 誠蔑弭灾 致此亢旱 知無所禱 殿郊盡赤 魯野無靑 墨綏無施 蒼生何辛 敢竭鄙忱 薦此珪幣 庶享明禋 無群庶(殃)
(右行 郡守 南侯 所作 癸未 六月 日)

구정봉 기우제 축문
높게 솟은 달과 북두칠성이 뚜렷하여 그 신령함에 연못에 구름과 비를 모아 혜택을 베품이 끝이 없네. 신께서 그 갚음이 다다름을 사람이 사모하여 우러름입니다. 내가 부덕함에 부끄럽나니 이 땅의 관리가 되어 군을 다스리는 재주가 모자라고 재앙을 그치게 하는 정성이 없어 이곳에 큰 가뭄이 이르렀으니 빌 바가 없음을 압니다. 전각이나 성 밖이 모두가 적나라하니 노들에는 푸르름이 없고 사령은 베품이 없으니 백성들은 어찌 고생한가. 감히 비루한 정성을 다하여 이 홀과 폐백을 드리어 밝은 제사를 지내니 바라건대 여러 재앙이 없으소서.
(위 줄은 군수 남후가 계미년 6월 ○일에 지은 바이다.)


여기서 ‘구정봉 기우제 축문’은 적어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하여 중종 25년(1530년)에 완성한 지리서임을 감안할 때,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바위에 세겨진 명문 ‘知郡 權昌燮’ ‘知郡’은 군의 행정을 책임지는 최고 책임자인 ‘知郡事’를 의미한 듯 하다. 권창섭은 1880~1881년 사이에 재임한 영암군수이다(영암향교 공적비). 신사년은 1881년으로 조선말에 계속되었던 30년 대가뭄 (1876~1905)기간에 속한다. 명문 마지막에는 비를 기원한다는 의미의 ‘祈雨’가 새겨져있다.

고려시대에는 산천제를 ‘잡사’(雜祀)로 분류했고, 대·중·소사 등으로 구분하지 않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국제(國祭)가 행해졌는데 월출산을 월생산(月生山)으로 부르며, 국가가 주관하는 국제를 거행했다고 한다.

산천에 대한 숭배는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는데, 조선 초에는 명산에 작호를 내려 국가제사로 거행했다. 태종 13년(1414년)에는 예조 사전(祀典) 제도를 통해 고려시대의 제사를 이어받았으나 이 과정에서 월출산 산천제는 국가가 직접 주관하는 대상에서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세종대에는 명산에 대한 봉작이 삭제되고 국가사전에서 제외되어 소재지 수령이 산천 제사를 주관하였으며 조선의 산천제는 기우제의 기능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월출산 제사는 국가가 주관하는 제사에서 빠지게 되어 제사의 위상이 달라졌으나 제사는 계속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 전라도조에 의하면 “사직단(社稷壇)은 군의 서쪽에 있고, 문묘(文廟)는 향교에 있다. 성황사는 군의 남쪽 3리에 있고 월출산 신사는 본읍에서 제사를 지낸다”라는 기록이 있어 월출산 신사에서 수령이 제사를 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월출산에서 소사 혹은 국제가 이뤄졌다는 기록과 함께 천황봉 발굴조사에서도 유물이 발견돼 당연히 월출산에서 가장 높은 천황봉에서 제사가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됐으나 이번 조사에서 그 예상을 깼다는 점이다. 1994년 월출산 천황봉 조사에서 제사 흔적의 유물이 발견돼 산천제가 있었음이 밝혀진 바 있다.

6개의 납구슬 출토 배경은?

사찰에서 발견된 납구슬에 대해 아직까지 학술적인 규명이 정립되지 않았으며, 몇 가지 추정이 있을 뿐이다. 납구슬이 만들어진 이유로 △보주(寶珠)의 일종 △건물을 세울 때 안전을 빌며 묻었던 예물인 진단구나 지진구 △일제 소행으로 전국 각지에 박았던 쇠말뚝처럼 조선의 지기(地氣)를 누르기 위한 용도 △임진왜란 당시 사용됐던 탄환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납구슬이 설치된 목적을 분명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납구슬이 어느 시대, 누구에 의해 설치됐는지 조차 알려진 바 없다. 납구슬의 출토지에 따라 신라시대 말엽부터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주장까지 있다.

불교문화재연구소는 포천 선적사지나 군위 인각사지 납구슬 제작연대를 조선시대로 추정했다. 하지만 납구슬의 제작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이 또한 근거가 미약한 실정이다.

월출산 구정봉에서 발견된 6개의 납구슬이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납구슬과 다른 점은 첫째, 불교 사찰이 아닌 곳에서 발견된 특징이 있고, 둘째 여섯 개가 온전한 형태로 조합되어 있었으며 셋째, 납구슬 표면에 묻은 회색물질이 온전히 수거되었다는 점이다.

즉 납구슬을 묻는 행위가 비단 불교적 목적이 아니라 풍수와 관련하여 지세를 다스리기 위해 묻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풍수에 밝은 강모씨는 “구정봉 정상의 납구슬은 구정봉의 영기를 억누름으로써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묻은 것이다”며, “즉시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월출산 구정봉 주변의 바위에는 크고 작은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무술년 명문’ ‘정묘년 명문’ ‘무진년 명문’ ‘신사년 명문’ ‘을묘년 명문’ 등이 이번 조사 과정에서 발견돼 구정봉 제사 전통의 규모와 내용, 그리고 구정봉 역사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영암문화원은 이번 조사 결과를 「월출산 구정봉 제사터 연구」 라는 제목으로 문화원 홈페이지(www.yaculture.org)에서 공개하고 있다.
 

김진혁 기자  zzazzar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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