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4>일본문화의 시조, 영암출신 왕인박사(上)

상대포구 군서면 구림마을 앞 상대포구. 왕인박사는 도왜 당시 상대포구에서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일본 유학의 개조 역할
영암 출신이라고 전해지는 왕인박사의 도왜 사실을 기록한 초기 역사서의 하나인 ‘속일본기’에 “왕인박사 때문에 유풍이 일어나고 文敎가 발달했다”라 했듯이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가져와 일본유학 개조 역할을 하였고, 왜국 태자를 교육하는 교육자 및 일본문학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와카의 시조역할을 하여 일본의 ‘前賢故實’에서 현인으로 추앙되고 있는데서 일본사 전공자인 대진대 나행주 교수가 일본역사가 ‘미개에서 문명으로’ 전환되는 곳에 왕인 박사가 있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왕인은 5세기 초(AD405, 백제 전지왕 2년), 응신천황의 초청으로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왜에 건너가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에 기여한 인물이다. 응신천황은 야마토에 있는 궁성을 기나이 지역으로 옮겨 가와찌(하내)왕조의 시조라 일컬어진 국왕인데, 조선반도로부터 선진 문물을 적극 도입하여 체제를 정비하려 하였다. 말하자면 고대국가 형성의 기틀이 되는 문자를 비롯하여 국가운영에 필요한 행정조직을 만드는데 지식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왕인이 일본문자인 ‘가나’의 시조라고 일컬어지고 왕인 후예들이 재정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기록들에서 이러한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적 목적의 도왜 논쟁
이러한 왕인박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4년 4월 5일 영암에서 제1회 왕인문화축제를 개최한 이래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영암군과 왕인박사현창협회가 중심이 되어 행사를 지속하여 왔다. 더구나 앞서 짧게 언급했지만 왕인박사의 도왜 자체를 부정하려는 일부의 주장이 있는 상황에서 (사)왕인박사현창협회 부설 왕인연구소는 왕인박사의 도왜 사실 등을 실증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루어 내고 있음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 고등학교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 8종 가운데 3종 출판사에서 왕인박사 도왜 사실이 누락되고 있는 등 최근에 이르러 왕인박사의 도왜 사실이 강조되기는커녕 교과서 수록여부를 걱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렇게 된데는 그동안 실증적인 연구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현대에 이르러 한ㆍ일 양국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용된 측면도 있어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주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왕인박사의 도왜 사실이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되었다 해서 왕인박사의 도왜가 일본 고대문화 발전에 끼친 공적은 결코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하여 그것을 낮게 평가하려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 여겨진다. 결국 객관적인 사실을 밝혀 더 이상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왕인의 본명은 ‘화이(和邇)’

히라카타시 왕인묘 왕인박사가 일본 땅에 처음 상륙했다고 전해지는 곳인 사가현 칸자키에는 왕인신사가,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의 나가오역(오사카부) 주변에는 왕인묘가 있다.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왕인박사에 대한 기사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속일본기’에 나온다. ‘고사기’에 “백제국의 임금인 조고왕이 암수 말 1필 씩을 아지길사에게 딸려 바쳤다. 또 백제왕이 큰 칼과 큰 거울을 바쳤다. 그리고 천왕은 ”백제국에 만약 현인이 있으면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명을 받아 사람을 보내왔는데 이름이 화이길사(和邇吉師)였다. 또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등 모두 11권을 이 사람에게 딸려 바쳤다.(화이길사는 문수(文首)씨 등의 시조이다”라고 언급된 이후, ‘일본서기’에도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화이길사’ 대신 ‘왕인(王仁)’이라고 인명이 달리 언급되어 있는 점이 차이가 있지만 ‘화이’는 왕인과 같이 ‘와니(わに)’로 독음되고 있어 동일 인물로 생각된다. ‘길사’는 문사의 존칭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화이’가 이름이 아닐까 한다. 일본 ‘河內志’에 ‘왕인의 묘가 하내국 교야군 등반촌 동북어 묘곡에 있는데 ’爾墓(이묘)‘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다. 왕인을 ‘爾’(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다른 왕인관련 사적들도 ‘화이’라고 한 것이 많은 것을 보면 ‘화이’가 본명이고, 왕인은 ‘덕이 높은 사람의 존칭’이라는 유승국 박사의 고견이 일리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왕인의 본명은 ‘화이’가 분명하다고 하겠다.
 
한족((漢族)계의 주장은 잘못
한편 ‘속일본기’에서는 한고조 후예인 왕란의 후손 왕구가 백제에 와서 살았고, 그 후손이 왕인이라고 기술하여 왕인을 중국계로 인식하고 있다. 대표적인 왕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 ‘행기’ 스님의 묘비에는 ‘本出於百濟王子王爾之後焉(행기는 본래 백제 왕자 왕이의 후손이다)’라고 하여 백제 출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도 왕인을 ‘왕이’로 적고 있는 것이 눈에 띄지만, 이 묘비가 작성될 때가 749년으로 일본과 당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상황에서 왕인이 한족 출신이라면 그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화이를 같은 독음인 왕인으로 바꿔 읽은 다음, 왕씨라고 중국계로 부회한 것은 아닌가 한다.

여하튼 일본초기 역사서들이 모두 왕인박사의 도왜 사실을 상세히 다루었던 것은 ‘천자문’과 ‘논어’의 전래가 일본사회에 끼친 영향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도왜 사실 자체까지 부정하려는 분위기가 나타났다. 그것도 이 지역 학자가 먼저 주장하고 타 지역 학자가 가세하여 뜨거운 논란이 되었다. 그들은 6세기 초 중국 양나라 주흥사가 처음 만들었던 ‘천자문’을 5세기 초 왕인이 도왜할 때 가지고 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왕인의 존재는 애초에 없었을 뿐 아니라, 6세기 왜에서 활동했던 백제계 왕진이(王辰爾) 이야기가 일본서기 등에 왕인으로 윤색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왕인 이야기가 강조되었던 것은 일선 동조론 때문이고, 지금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또 다른 일선동조론 부활이라고 하였다.

박사는 종요의 천자문을 가지고 갔다
하지만 천자문은, 주흥사 이전에 이미 위나라 종요가 펴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왕인이 가져간 천자문은 당연히 종요가 찬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천자문을 가지고 왕인 도왜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왕진이는 6세기 전후에 도왜하여 왕인과 1세기 이상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한시집이라고 알려져 있는 ‘회풍조서(懷風藻序)’에 “왕인이 응신천왕 때 몽매함을 가루시마(輕島)에서 깨우쳐주는 것을 시작하였고, 왕진이는 민달천왕 때 대화지역에서 가르치는 것을 마무리하였다”라고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동일인이 아님이 분명하다.

실제 왕인은 書(西)文씨의 시조, 왕진이는 선(船)·진(津)·갈정(葛井)씨의 시조로 구분이 되고 있고, 씨사(氏寺)도 왕인은 서림사·화이신사인 반면, 왕진이는 야중사·등정사 등으로 달라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단지 1세기 늦게 건너 온 왕진이가 왕인 후예들이 거주하였던 오사카 古市에 정착하여 훗날 사람들이 약간 혼동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나중에 건너온 왕진이 일족이 먼저 온 왕인계보로 거짓 꾸미는 분위기가 8세기말 약간 보이는데 이를 일부 학자들이 혼동한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왕인박사의 도왜 사실을 부정하려는 논거는 설득력이 없다 하겠다. 다음호에서 이 문제를 상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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