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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무화과의 아픈 추억

학산면 매월리 生
전 한국일보 기자 
5·18광주민중항쟁 관련 강제해직(민주유공자 포상)
전 무등일보 주필 발행인 겸 사장

요즘 차를 운전하고 달리다보면 도로가에 ‘무화과 판매’ 라는 표지판을 세워놓고 무화과를 파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다. 그 때마다 “벌써 무화과 철이 되었구나?” 싶어지면서 영암 무화과에 관련된 아픈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것은 무화과를 영암에 처음으로 도입, 재배한 사람이 내 친구였기 때문에 그렇다. 

알려진 대로 영암 무화과는 1970년대 삼호농협에 근무했던 박부길(朴富佶)에 의해 시작되었다. 목포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농대를 나와 농협운동에 뛰어든 그는 누구보다도 ‘잘사는 농촌’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아열대식물인 무화과가 그의 고향인 삼호지역에서도 재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학교 다닐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그와 고향이 같은 영암이라는 데서 친하게 지냈다. 자랑 같지만 그는 정말로 인격이 갖춰진 괜찮은 사람이었다. 입이 무거웠고 남의 흉허물을 함부로 얘기하지 않는 인격자였다. 누가 남의 얘기를 할라치면 빙그레 웃어주는 것으로 반응을 보일뿐. 이사람, 저사람에게 옮기는 법이 없었다. 동창사회에선 그가 가고 없는 지금에도 그의 얘기가 나오면 “아 그 얌전한 놈 얘기냐?”며 ‘점잔했던 친구’로 아쉬워들 한다.

그가 결혼식 때 주고받은 기념 선물은 당시 신문들을 도배질 했다. 한국 농촌을 살릴 꿈을 가졌던 그는 아내에게 호미를 선물했고 아내는 농업대사전을 선물했다. 결혼후 날 찾아온 그는 무화과 얘기를 꺼냈다. 아열대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지만 자기 고향에서도 충분히 재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자주 등장해서 터키나 지중해성 기후에서 자라는 게 무화과로 알고 있는데 우리고향 영암에서 재배가 가능하다니 재배가 성공을 하면 큰 기사거리가 되므로 내가 신문에 써주겠다.” 며 약속을 하자 “고맙다”며 돌아갔다. 그로부터 얼마를 지났을까?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무화과 재배가 성공을 했단다. 기사거리가 있으면 기자가 뛰어 가는 것이 당연한데도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무화과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를 배경으로 무화과를 따는 모습의 사진을 찍어서 가져오라.”고 했다. 친구 사이지만 시키는 일에 화를 낼 법도 한데 착하디 착한 그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해서 사진도 제법 내가 바라는 대로 잘 찍어 가져 왔다. “아열대 식물이 영암에서 재배에 성공했다.”는 기사는 한국일보에 대서특필 되었다. 당시 한국일보는 ‘주간한국’ 이라는 주간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주간지용으로도 써 보내라는 지시가 있어서 내려가겠다고 했다.

신문에 보도가 나가자 사방의 언론들이 몰려들어 부길이는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나의 취재에 적극 협조를 했다. ‘주간한국’에도 보도가 잘 나갔다. 봄철부터 무화과 가지를 손질하는 모습부터 새벽 일찍 일어나 무화과를 따는 모습 등의 전 과정의 화보 사진과 함께 아열대식물인 무화과를 외국에서 가져와 재배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자세하게 다뤘다. 친구가 하는 사업이니 “좀 잘 써주자.”는 계산된 생각에서 내 욕심대로, 쓰고 싶은 대로 썼더니 기사를 자르지 않고 그대로 실어줬다.

기사를 본 친구가 너무나 좋아했다. 광주로 올라와 기사가 나간 ‘주간한국’을 좀 많이 달라 했으나 없어서 못 줬다. 당시의 ‘주간한국’은 한 주간에 있었던 정치적 이슈를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들이 심층취재 보도하고 사건들도 전국 곳곳의 기사를 집중적으로 다뤄 한 부에 20원씩에 판매, 날개돋힌 듯 팔리고 있었다.

그처럼 많이 팔리는 주간잡지에 ‘영암 무화과’가 소개 되었으니 친구가 좋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친구는 “사흘 뒤에 올라와서 식사 한번 하자” 약속하고 내려갔다.

그로부터 사흘 뒤 -. 갑작스런 연락이 왔다.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버스와 부딪쳐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한 약속도 있고 해서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목포 쪽으로 가던 버스가 서창초등학교 뒷산을 안고 돌면서 삼호에서 저수지 둑길을 타고 오던 오토바이를 미쳐 보지 못해 치었다고 했다. 그는 그날 “영암읍에 볼일이 있어 간다.” 고 했단다.  나를 만나러 오다가 난 사고는 아니었다는 생각에 가슴을 짓누르는 부담감은 덜었다. 삼호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서 난 하염없이 울었다. 많이 울었다.  그렇게도 집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다 갑자기 갔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고 그가 꿈꿨던 이상농촌 건설은 물거품으로 끝나는 것이냐는 사실 앞에 더욱 가슴 아팠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준영 전 전남도지사가 그의 아우라는 점에서 나는 친구에 대한 믿음이 과신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박부길은 영암이 낳은 미완의 ‘큰 인물’이었다. -. ”

박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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