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재홍 교수, 중국 진시황릉ㆍ병마용갱을 가다
수 천여 명의 병사들 살아 움직이는 듯한 ‘병마용갱’
현종왕이 양귀비와 사랑을 속삭였던 목욕탕 ‘화청지’

■ 진시황릉
지난 3월초 인천공항에서 3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중국 서안에 갔다. 그동안 사진만 보고 무척 호기심을 가졌던 진시황릉과 용마용갱, 양귀비의 별장 화청지 등을 보고 왔다.
진시황릉은 지상의 황궁을 그대로 옮겨 지하에 재현했다고 한다.
진시황릉 현장에 도착하자 황릉은 야산처럼 된 산등성이만 보일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입구에 ‘진시황릉’이란 간판만 세워져 있었다. 아직 발굴이 안되어 우리 방문단을 크게 실망시켰다.
진시황릉 묘지는 지난 2007년 중국 고고학자들이 원격탐지 장치를 이용해 내부 벽을 확인해 진짜 진시황릉 묘지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진시황릉은 기원전 246년부터 340만명의 인부를 동원해 건축을 시작했다. 진시황릉은 높이 76m, 넓이 350㎥의 흙으로 조성된 피라미드다.
진시황릉 내부는 수은이 흐르는 5천여 개의 강과 수십 개의 망루 그리고 온갖 보물과 병사로 화려하게 조성되었다고 한다.
진시황릉 완공 후에는 도굴을 막기 위해 엄청난 수의 인부들을 모두 사살했다고 한다.

■ 병마용갱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있다.
병마용갱은 진시황제의 장례에 사용된 양질의 점토를 구워 낸 토기류 석재 조각물(구은 흙)인 테라코타(terracotta)이다.
병마용갱은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발견되어 조사가 시작되었다.
처음 1호갱을 들어서자  마자 모두들 깜짝 놀랬다고 한다.
수 천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줄을 지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듯 착각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용감한 병마용들이 갱안에서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병마용 모두가 얼굴이 달랐다. 살아있는 듯한 웅장한 모습의 등신대로 제작되었다.
얼굴은 채색된 흔적이 있었다.
병마용은 키가 184에서 190㎝로 실제 병사보다 큰 편이다.
장군은 병사보다 더 크게 만들어졌다.
병마용은 전사, 전차, 말, 장교, 곡예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현재 발굴된 4개 갱도 중 3곳에 병사 8천여 명, 전차 130개, 말 150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상당수가 흙에 묻혀 있다고 한다.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건립은 기원전 246년, 지금부터 2263년 전의 일이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중국의 놀라운 기적을 볼 수 있었다.

■ 화청지
여기에 덧붙여 중국 서안에서 당나라 6대 현종왕이 양귀비와 사랑을 속삭였던 목욕탕 ‘화청지’도 빼놓을 수 없다.
이 ‘화청지’ 목욕탕은 43도의 온천수가 솟았다고 한다.
이 목욕탕은 당나라 때에는 ‘화청궁’이라고 불렀다.
화청궁에는 현종왕이 양귀비에게 지어준 ‘해당탕’이 있다.
현종왕과 총비 양귀비는 이 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기며 사랑했다.
양귀비는 매일 이 목욕탕에서 온천물에 목욕을 하고 미모를 가꾸어 현종왕을 영원히 붙잡아 두기 위해 밤낮으로 유혹하면서 사랑을 속삭였다고 한다.
화청궁 해당탕 앞에는 양귀비가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 동상이 서있다.
흰 대리석으로 된 양귀비 동상은 풍만한 가슴과 몸매로 일부 몸을 드러낸 매우 매력적인 여성의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양귀비는 본명이 ‘양옥환’이다.
그녀는 부모를 여의고 숙부집에서 자라면서 노래와 춤, 미모가 뛰어났다.
‘양옥환’은 17세 때 현종왕 18번째 아들 ‘수당’ 왕자와 결혼해 6년간 살았다.
현종왕은 자신이 연주한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는 아름다운 며느리를 강제로 빼앗았다.
그 후 아들은 재혼시키고 며느리 ‘양옥환’을 27살 때 양귀비로  책봉했다. 
당나라 대표 시인 ‘백거이’가 ‘장한가’에 쓴 양귀비와 현종왕의 사랑의 노래시가 유명하다.

연꽃 휘장 속에서 보낸 뜨거운 봄 밤
봄밤이 너무 짧아 해가 높이 솟았구나
황제는 이날 이후 조회도 안나오네
후궁 미인들은 3천명이나 되었지만
3천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네
금으로 치장한 궁궐에서 화장을 끝내고 기다리는 밤
백옥 누각에 잔치 끝나면 피어나는 봄 꽃

결국 현종왕은 양귀비의 사랑에 빠져 나라를 망하게 했다.
양귀비는 자신의 친인척을 대거 등용, 부패권력을 양산해 반란 세력의 공격으로 죽고 현종왕도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중국 진시황제의 황릉과 병마용갱의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과 인간의 무서운 힘 그리고 중국의 4대 미인 중 하나인 양귀비가 자신의 미모로 나라를 망쳤던 중국의 산 역사가 3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중국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많은 감동과 교훈을 남겨 주고 있다.
                               
  ○ 서호면 몽해리 아천마을 출신
  ○ 경기대 언론미디어학과 외래교수
  ○ 가나문화콘텐츠그룹 부회장
  ○ 전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
  ○ 전 KBS제주방송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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