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성씨 기행 - <16> 밀양 김씨영암이 대표적 문중… 영암 서호 입향조는 우남공 김윤신

 

노동사 노동사는 서호면 청룡리 노동에 있는 사우로 1936년 창건되었으며, 공신 김견, 김경발, 문과 급제자 김종환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시조는 경순왕의 후손 김승조
밀양김씨(密陽金氏) 시조 김승조(承祖, 호는 弘毅齋)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으로, 갑신보 세록편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의 13세(=12대손)이다. 그는 북방의 오랑캐 침입을 막고 1272년 고려 원종 13년 명장 김방경의 막하장이 되어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사직(司直)에 오르고 밀성(밀양)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밀양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 김승조의 묘는 경기도 개성시 용산동에 있으며, 영암 서호면 청룡리 밀양김씨 세장지지(世葬之地, 도선산)에는 시조 단(壇)이 있고, 매년 봄(음3/20) 서호면 화송리에 있는 송정사에서 영암 유림들과 함께 제향한다. 밀양김씨는 6세 김수서가 좌사의를 지낼 때 왕의 뜻에 맞지 않은 간언을 했다가 금릉에 유배되어 그곳에 살다가 그의 손자들이 각지로 분산,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밀양김씨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60명 정도인데 주로 한양, 경기도, 황해도, 영암 출신이 많으며, 무과 급제자 중에는 김막쇠(金莫金, 경기 여주), 김바위(金岩回, 경기 수원), 김언놈(金於仁老味, 평남 중화), 김큰보(金大福, 경기 양주) 등 한글식 이름을 가진 평민들도 있다. 관직자 등 밀양김씨 인물로는(영암 출신은 말미에 별도로 기재), 시조의 아들 김혁이 문하부의 찬성사(정2품)를 지냈고 그의 아들 김희천은 검열, 판관 등을 거쳐 병부사에 올랐다. 5세 김영추는 시랑을 지냈고, 그의 큰아들 김수서는 승지를 지냈으며, 둘째 아들 김광석은 태종 때 통정대부 행밀양부사를 지냈다. 그리고 1465년 문과에 급제한 7세 김문호(영암 입향조의 父)는 의주부윤을 역임했으며, 그의 증손 김홍준은 이등공신으로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김홍준은 충남 서산파의 파조이다. 경기도 고양파 파조인 김양선은 한성부 좌윤을 역임하였으며 강직한 성품과 탁월한 학문으로 덕망이 높아 칭송을 받았다. 또한 김덕령은 용양위 부호군, 김수주는 공조참의, 김광호는 이조참의를 역임했으며, 김상민은 학자로 유명했다.

영암 공신2, 급제11, 사우 3개

송정사 송정사는 서호면 화송리에 있는 사우로 1956년 창건되었으며, 밀양김씨 시조 홍의제공 김승조, 영암입향조 우남공 김윤신, 통정대부 송정공 김중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밀양김씨 분파는 우남공파(영암파, 김제파, 해남파), 서산파, 평남파, 고양파 등 지명을 사용한 10수개의 파가 있으며, 각 파 안에도 단계별로 많은 지파들이 있고, 파조의 호를 붙인 파명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밀양김씨 항렬자는 20세 浩, 21세 相, 22세 炳, 23세 在, 24세 錫, 25세 洪, 26세 植, 27세 燦, 28세 培, 29세 基, 30세 錫, 31세 永, 32세 東, 33세 烈, 34세 基, 35세 鈺, 36세 洙, 37세 根, 38세 炯, 39세 遠, 40세 圭로 5행상생법을 채택하고 있다. 한편 밀양김씨 전국 인구수는 2000년 조사에서 9,951명의 소수로 나타나 전국 성관(姓貫)별 인구순위 286위를 기록했으며, 우리 영암에 살고 있는 밀양김씨는 59가구 122명으로 타 성씨에 비해 비교적 적은 수이나 그래도 전국평균 비율의 10배에 가까운 수치로, 영암에 밀양김씨가 아주 많이 살았다. 전국 시도별 인구대비 밀양김씨는 광주, 전남에 많이 살고 있으며 제주와 충북에는 아주 적은 수가 살고 있다. 밀양김씨 집성촌(세거지)으로 전남 도내에는 영암군 서호면 청룡리 노동, 화송리 송정, 학산면 금계리 계천,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등이 있다.
우리 영암 서호면,학산면 일원에 밀양김씨가 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반 우남공 김윤신(8세) 선생이 금릉(강진)으로부터 서호면 화송리로 이거해 오면서 부터이다. 우남공의 화송리 입향 이후 후손들은 화송리 송정, 청룡리 노동, 해남 화원, 전북 김제 등지로 분거 이거해 갔다. 그래서 현재의 밀양김씨 영암문중은 노동파(큰집안)와 송정파(작은집안)로 구분되며, 화송리 입향이후 꾸준히 발전, 번창하면서 재실(考槃齋) 등을 운영하고, 공신 2명, 문과 급제자 1명, 무과 급제자 10명을 배출하였으며, 문중 사우도 3개(노동사, 송정사, 은산사)나 창건되었다. 그리고 재실인 고반재 및 교지 등의 많은 고문서들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영암은 무신 중심의 충신, 관직자
밀양김씨 영암인물을 살펴보면, 김광후(光厚)는 무과에 급제하고 군자감정을 거쳐 훈련원판관을 지냈다. 그는 입향조 김윤신의 손자로 밀양김씨가 영암 화송리에 입향한 이후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며, 그의 증손 대까지 10명의 무과 급제자가 배출되면서 가문이 번창하였다.
김견(堅)은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호는 신재(愼齋)이다. 그는 입향조 김윤신의 증손자이자 판관 김광후의 아들이며 선전관, 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당항포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또 선조 임금을 호종(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하며 노천 주방에서 임금의 수라를 잘 받드는 등 임금 곁을 떠나지 않고 호종하여 선조 임금으로부터 '천리 길을 걸어 왕을 보살핌에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였다'는 의미의 '천리근왕 손구구치(千里勤王 損軀驅馳)' 여덟 글자를 하사받았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고 벼슬이 추증되었으며, 근무(勤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서호면 청용리 노동사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3명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김경발(景發)은 주부 김견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 등을 지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왕이 피난 길에 나서자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충심으로 호종하였으며, 6품 관직이 내려졌으나 취임 전 28세의 젊은 나이로 순사하였다(호남읍지). 진무원종공신에 녹훈되어 아버지 김견과 함께 부자 공신(功臣)이 되어 밀양김씨 가문을 빛냈으며, 청룡리 노동사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김곽(   )은 무과에 급제하고 만호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는 입향조 김윤신의 증손자이자 주부 김견의 동생으로, 화송리 송정으로 분거(分居)한 작은 집안(송정파)의 파조격이다.
김홍발(弘發)은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판관, 군기시 첨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김성발(聲發)도 무과에 급제하였고 마지막 직은 주부이다. 김수발(粹發)은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 선전 등을 역임하였으며, 김상명(尙鳴)도 1651년(효종 2) 무과에 급제하였고 마지막 직은 현감이다. 김시명(始鳴)은 1651년(효종 2)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마지막 직은 별제이며, 김선명(善鳴)도 1660년(현종 1) 무과에 급제하였고 마지막 직은 첨사이다.
김중명(重鳴)도 1660년(현종 1)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마지막 직은 우후(虞侯)이다. 김중명은 인평대군의 아들 복선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허견(許堅) 등의 역모를 사전에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통정대부 품계를 받았다. 화송리 송정사에 배향되었다.
이처럼 밀양김씨 영암문중에서는 1600년대에 10명의 무과 급제자가 배출되는 등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으며, 이후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다가 186년 후 체암공 김종환(宗煥)이 대과(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주부 김성발 6세(5대손)로 1846년(헌종 12) 정기 과거시험인 식년시의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사헌부지평, 개성경력 등을 역임하였다. 청용리 노동사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음직 참봉 김진(軫), 통덕랑 김하명(夏鳴) 외 많은 인물의 증직, 가자(加資:여러가지 이유로 품계를 올려주던 일)가 있어 가선대부, 통정대부 등의 품계를 받았다. 또 조선말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송와(松窩) 김병규(炳圭)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면암 최익현과 송사 기우만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요체를 익혔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효도와 우애로 집안을 단속하고 시례(詩禮:가정교육에서 詩와 禮를 가르치는 것으로, 사대부가를 말함)에 전념하였다. 그는 또 문중의 힘을 모아 문중 사우인 노동사를 창건하였으며, 부친인 노은공 김상익과 함께 서호면 청룡리 은산사에 배향되었다.
밀양김씨 현대 영암인물로는 전 내무부 고위관료 출신 김인식, 전 광주시의원과 전남도의원을 역임한 김재명, 교육계에선 장학사를 역임하고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상회, 김성기 전남대 법대교수, 김재천 서울한서고등학교 설립자, 법조계에선 올해 변호사 개업을 한 김경석 군산지청장, 관계에선 김병천 안기부 고위관료, 김재철 전 전라남도부지사, 경제계에선 김명석 금풍건흥(주) 대표이사, 김재윤 계동물산(주) 대표이사, 금융계에선 김문기 광주은행 지점장, 김창규 전 영암군산림조합장, 김천식 전 한국자유총연맹 광주시지부장 등 많은 인물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11년 제53회 사법고시에 나란히 합격, 화제를 모았던 김수민 성남지청 검사, 김수양 서울고등법원 재판연구원이 있다. 김수양씨는 김경석 전 군산지청장의 장녀이자 부녀 고시파로 서울대 법대출신의 재원이다.
문태영 객원기자(네이버 명예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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