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주골

이 기 홍 서호면 몽해리 출생 장천초등학교 졸업 전 목포교육장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내 남자하고 살아요.”
정님이의 대답을 듣는 순간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20여 년 전, 내 남자란 말을 처음으로 들었고, 또 그것이 정님이로부터였기 때문이다. 연속극에서도 내 남자란 말을 사용하지 않던 시절, 정님이에게서 들은 내 남자란 말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87년부터 3년 동안 섬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생이라고 해봐야 10명 내외가 한 반인 작은 학교였지만, 일과운영은 도회지 큰 학교와 다를 것이 없었다. 섬에 들어간 해에 나는 정님이를 담임했다. 체구는 작았고 표정은 어색했으며, 콧물 자국이 마르지 않았다. 붉은 빛이 나는 정님이의 얼굴은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고,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르면 가까이 오지 못하고 양손을 턱 가까이 올려놓고 손톱을 매만지거나 이빨로 물어뜯으며 조금은 두려운 모습으로 서있기도 했다.
학력은 측정 자체가 불가능하였으며 학교에 빠짐없이 나오는 것 외에는 교육활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정님이는 6학년에 올라올 때까지 학교생활 적응 수준의 학습활동을 해 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6년 동안 이름 석자도 쓰지 못한단 말인가? 아무려면 그 쉬운 노래 한 곡도 부를 수 없단 말인가? 당시 교직 경력 15년을 맞고 있는 나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아이들이 떠나버린 교실에서 정님이와 단둘이 풍금을 사이에 두고 학교 종 노래에 도전했다. 내가 풍금을 쳐가며 선창하고 정님이는 따라 부르기를 십여 일, 결국 처음으로 가르칠 수 없는 아이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래도 무언가를 시켜야 하겠기에 정님이를 미화부장으로 임명했다. 사진을 찍어 복사한 학급문집 속에 정님이 탐방이란 글을 올렸고, 그 곳에 미화부장이란 직함을 써 넣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이들의 놀림거리에서도 비껴있는 정님이는 나만 보면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학교생활을 즐거워했다. 그린다거나 만든다거나 뛰는 시간이면 유난히 즐거워했다. 특히 모든 일과가 끝나고 편을 갈라 축구를 하는 시간이면 정말 어쩔 줄 몰라 하며 재미있어 했다.
그렇게 3년을 그 곳에서 보내고 이동하여 근무하고 있던 날 저녁, 한번은 아내를 놀라게 하는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내 이름을 부르며 바꾸라고 했다. 너는 누군데 그러느냐며 지금 집에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자기는 정님이이니 숨기지 말고 기홍이를 바꾸라며 도통 곧이듣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님이의 전화를 받게 됐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가가 너무 궁금하고 전화하는 방법을 어떻게 익혔을까가 하도 신기하여 물었더니  대꾸도 하지 않고 내가 무척 보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나도 보고 싶었다며 어떻게 지내느냐고 하니 집에서 그냥 논다고 했다. 그 후로도 가끔씩 전화가 왔고 아내는 그럴 때마다 당신 애인이라며 바꿔주었다. 내가 집에 없을 때는 아내에게 “바꿔줘!”만 연발하곤 했다.
정님이가 나를 찾다 소식이 끊긴 지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추석 무렵, 정님이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는 소금냄새가 가신지 오래였으며, 경인 말씨로 바뀌어져 있었다. 반갑고 훌쩍 성장한 정님이의 목소리에 이것저것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고향에서 지내다 공장에 취직을 했다는 것, 추석을 맞아 집에 왔다는 것, 또한 다시 직장에 복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무심결에 누구하고 어떻게 지내느냐고 했더니 정님이는 주저함도 없이 내가 놀란 그 말, 내 남자하고 재미있게 산다는 것이었다.
나는 밥도 잘해주느냐고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내 남자는 너에게 잘해 주느냐고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해줘요! 시간이 지나면 내 남자와 결혼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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