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5월5일(236호)

▲ 본사 대표이사 발행인

“내 생전에 위령탑이라도 세워 그분들의 한을 달래주고 싶습니다.” 5월 초입, 한 촌로(村老)가 신문사에 전화를 했다. 금정면에 사는 한 촌로인데, 사장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0여 분만에 신문사에 도착했다. 한두 번 뵈었던 낯익은 어르신이었다. 그 어르신은 빛바랜 가방 속을 뒤지더니 신문에 난 자료 등을 내놓았다. 그리고 대뜸 금정면 연보리 ‘양민 학살사건’을 아느냐고 물었다. 금시초문은 아니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터였기에 ‘전후세대’라서 잘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어르신은 깊은 한숨을 내몰아 쉬면서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6·25를 전후해 영암에서 일어난 민족의 또 다른 비극사를 들어야 했다. 1945년 해방이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극도의 혼란기에 금정면 산골에서 21세 때 경험했던 참상은 8순을 앞둔 이 촌로에게 시공을 초월하고 있었다.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이 무렵, 목포에 주둔했던 해병대가 들이닥쳐 마을공터에 동네사람 전부를 불러 모아 놓고 무차별로 사격을 가했다. 빨치산 토벌작전에 나섰던 부대 척후병이 빨치산 보초병에 의해 저격당하자 이튿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든 마을 사람들을 불러다가 떼죽음을 시킨 것이다. 그리고 마을에 불을 질러 쑥대밭을 만들어 버렸다. 이때 죽은 사람이 130명이 넘는다고 했다. 촌로는 빨치산들과 함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주변에 구덩이를 파고 흙으로 겨우 덮는 시늉만 했다고 한다. 어떤 부녀자는 어린 젖먹이를 가슴에 꼬옥 안고 죽었는데, 얼마나 힘들어 안았는지 시체가 떨어지지 않더라고 했다. 자신은 죽더라도 자식을 살리려는 강한 모성애를 보는 순간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눈가엔 어느덧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거창양민 학살사건에 버금가는 연보리 주민들의 집단 학살사건은 이 촌로에게 엄청난 가위눌림으로 자리해왔음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 기필코 그들의 원혼을 달랠 위령탑을 건립해야겠다는 일념이 촌로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그만의 짐이겠는가. 민족의 비극이 낳은 영암사람의 한(恨)이 아니던가. 가족이 몰살당한 처지에도 말을 못하고 지내온 유가족은 또 어쩌랴. 입이 있어도 말을 못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그 응어리진 가슴은 이미 새까맣게 타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행히 위령탑 건립비용 일부를 영암군에서 지원키로 했다지만 부지매입 등의 비용이 마련되지 않아 촌로의 마음을 조급하게 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느덧, 내 자신의 마음 한구석엔 ‘연보리의 집단학살사건’을 알려야겠다는 소명의식이 조용히 용솟음 치고 있었다. 대학시절, 80년 5월을 모소 체험하고 한때 구금생활에서 생을 포기해야 했던 나로선 촌로의 말씀이 더욱 새롭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 5월에 찾아오신 촌로의 방문은 5월에 대한 남다른 감회를 갖고 있는 나에게 또 다른 숙제를 안겨주고 돌아가셨던 셈이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고 있다. 물 오른 나뭇가지에 온 세상이 푸르름으로 충만할 때 최루탄이 난무했던 광주. 그리고 곧이어 무장된 군인에 의해 총격이 가해지던 그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쓰러져갔다. 6·25를 겪지 않았던 나. 하지만 80년 5월 광주에서 겪었던 그날은 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6·25의 아픔이 그대로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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