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8일(253호)

▲ 본사 대표이사 발행인

오늘(8일)은 백로(白露)다. 농촌들녁의 농작물엔 흰 이슬이 맺히는 처서와 추분 사이의 24절기 중 열다섯번째다. 맑은 날이 연이어지고 기온도 적당해서 오곡백과가 여무는데 더없이 좋은 날이다. 때문에 농작물과 연관된 백로에 관한 속담도 많았다. 이를테면 이렇다.

“백로에 비가 오면 오곡이 겉여물고 백과에 단물이 빠진다.” “백로 안에 벼 안팬 집에는 가지도 말아라.” “음력 8월 백로 미발은 먹어도 7월 백로 미발은 못 먹는다.” “백로 전 미발이면 알곡 수확률이 없다.” “백로 아침에 팬 벼는 먹고 저녁에 팬 벼는 못 먹는다.” 등등...

그러니까 백로는 1년 농사의 풍흉(豊凶)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 같다. 예전에는 여름농사를 끝내고 추수까지 일손을 놓는 때이므로 가까운 친척을 방문하기도 했다. 시집살이와 농사일에 허덕이던 아낙네도 친정집 나들이에 나선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요즘엔 그런 살가운 추억도 갈수록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시골(촌)스러운 정경도 차츰 우리의 곁을 등지고 있다. 시골은 시골스러워야 하지만, 자꾸 도시의 모습을 쫓고 있다. 논길은 시멘트로 발라지고, 한여름 낮잠을 즐기며 마을쉼터로 각광받던 우산각(모정)도 예전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최상의 관광자원임을 망각 해버린 채 몽땅 ‘바꿔바꿔’가 낳은 결과다. 편리함만을 추구한 탓이리라.

 메뚜기가 뛰어놀고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농촌의 농산물이 각광받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여전히 시골의 행정가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군수가 읍·면을 순회하며 여론을 수렴하는 ‘대화의 자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대부분의 건의가 옛 것을 헐어내는 내용이 봇물을 이룬다. 물론 군수의 입장에선 주민들이 원하는 걸 외면할 수 없는 처지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비생산적인 투자가 너무 많다. 이 때문에 마을냇가의 아름다운 돌담은 어느 사이 회색빛 블록이 차지해버린 곳도 있다. 흐르는 시냇물과 잘 어우러진 돌담은 물고기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어린시절 웃통을 벗어 제치고 물고기를 잡으며 목욕하던 곳도 바로 돌담으로 둘러쳐진 냇가였다. 그런데 시멘트로 만들어진 블록은 생태계 파괴는 물론이지만 고색창연한 전통마을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사가 두루마기 대신 가죽잠바를 걸쳐 입은 모습이랄까.

이런 부조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요즘 부쩍 말들이 많은 간척지를 놓고 보자. 수십년에 걸쳐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 부어 만든 간척지를 영산호 둑이라도 터서 다시 바다로 만들자는 발상이 고개를 든 이유는 무얼까. 세발낙지며 숭어·짱뚱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맛 좋기로 소문난 갖가지 어족자원은 관광시대를 맞은 요즘, 우리 영암의 큰 보배일 것이라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한때 ‘미친 짓’이라는 일본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에도 국가시책이라는 미명하에 간척지사업은 전국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에 와선 쌀농사는 결국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이 노릇을 어찌한단 말인가. 무조건 바꾼다고 좋은 것은 아닐 터, 100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慧眼)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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