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05일(제118호)

▲ 본사 대표이사 발행인

12월. 마지막 달력 한 장이 힘없이 매달려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으로 매달려 있는 한 개의 잎새, 그것을 보는 것처럼 벽에서 떨고 있는 이 해의 남은 한 달이 너무 아쉽기만 하다. 막다른 골목 어귀까지 쫓겨온 듯한 느낌이 불현 듯 앞서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엊그제 새해를 맞으면서 뭔가 단단한 각오를 했건만 세월의 덧없음은 벌써 또 다른 새해 맞을 준비를 요구하고 있다. 뒤돌아보면 잡히지 않는 뿌연 안개만 보일 뿐인데도.

그래도 예전의 12월은 낭만이 있었던 것 같다. 스산한 농촌들녘에 살포시 내려앉는 첫눈은 가슴 벅찬 설렘을 안겨주기도 했다. 금방 누군가 찾아줄 것만 같은 기대로 온종일 안절부절 못했던 그런 추억도 새롭다. 그러나 지금의 12월은 왠지 아쉬움 투성이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세월 앞에 인간의 한계를 느끼는 절박감 때문이 아닐까. 결국 인간은 세월을 창조해 가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그어 놓은 화살표에 따라 살아가는 무기력한 존재인 셈이다. 그럼에도 세상사는 아둥바둥의 연속이다. 12월의 정치 기상도 역시 여전히 안개속일 뿐이다.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민초들의 외마디는 안중에도 없다. 꽁꽁 얼어붙은 경기는 좀처럼 풀릴 기미는 보이질 않고 신물 나는 정치권의 싸움은 끝이 없다. 온통 정권욕에 사로잡혀 모두가 눈이 벌겋다.

단식투쟁의 모습도 가증스러울 뿐이다. 어제의 동지가 하루아침에 적이 되면서 개 거품 물고 쏟아내는 악담(惡談)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파병문제로 국론은 분열되고 TV에 비치는 부안사태는 이 나라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되집게 한다. 무엇하나 제대로 놓여 있는 게 없는 성 싶다.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혹자는 이를 두고 ‘한국식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민주주의에 ‘한국식’은 무엇이란 말인가. 요즘 어린 학생들에게는 미국식 민주주의나 영국식 민주주의는 익히 들어봤어도 한국식 민주주의란 다소 생소할 것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시절에 행해졌던 이 말은 대통령이 임명한 꼭두각시 국회의원들이 체육관에 모여 앉아 자신을 임명해 준 대통령을 간접선거라는 형식을 통해 다시 뽑아주는 기상천외한 제도다. 이른바 ‘엉터리’민주주의라 하겠다.

혹자는 왜 엉터리냐고 항변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식이나 영국식은 모두 민주주의 정신을 근본에 두는 제도인 반면 한국식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 다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란 적어도 국민의 대표자를 선출하는데 있어서 국민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 미국식이나 영국식은 방법상의 차이만 있을 뿐 양쪽 다 이 같은 기본적인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1970년대 한국식 민주주의는 국민의 참정권을 근본적으로 박탈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식 민주주의나 영국식 민주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한마디로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식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왜 일까. 국민의 주권이 제한된 상황에서 위정자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무엇이든 해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가 힘들다는 반증일 게다. 불행한 과거의 역사는 말해준다. 군부독재가 민심을 업고 등장했을 때는 어김없이 혼란을 틈타고서다. 몇해전 박정희 신드롬이 일었던 때를 우린 기억한다. 설마 내년 총선에서 또다시 박정희 신드롬이 나타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정치인들은 그동안 용케 살아온 민초들에게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작은 희망의 싹이라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램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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