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19일(제120호)

▲ 본사 대표이사 발행인

중국 역사상 여자로 황제가 된 유일한 사람은 측천무후(則天武后)로 불렸던 무조(武照)였다. 그 유명한 당 태종의 후궁이었는데, 태종이 죽자 감업사(感業寺)라는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죽은 황제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이후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황제에 오른 후 황후를 돌보지 않고 후궁을 총애하였다. 황후는 황제와 후궁사이를 떼어놓을 심산으로 감업사에 있는 무조를 불러 들였따. 평생 비구니로 청춘을 보낼 줄 알았던 무조는 궁중에 들어가 황후와 황제를 극진히 모셨다. 이로써 고종은 총애하던 후궁에게 가는 발걸음을 끊었다. 황후는 경쟁하던 후궁을 물리치자 비로소 안도했다.

하지만 그 무조가 자신을 몰아내고 황후가 되고 황제까지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병약한 고종을 대신해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던 무조는 고종이 죽고 중종이 즉위하자 섭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섭정으로 만족하지 못한 그녀는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물론 무조는 처음 황제의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섭정을 시작했다. 그러다 황제를 폐위하고 그 자리에 자신이 오르고는 다시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안환(蘇安桓)이라는 신하가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며 상소하여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은 모두 이씨(李氏)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직까지 황제 자리에 있지만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物極必反)’하고, ‘그릇이 가득차면 넘어진다(器滿卽經)’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라고 진언했다. 사물이 극에 달해 반전할 때가 되었으니, 이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이런 간언 정도에 물러날 그녀가 아니었던 것은 물론이다. 지난 15일 노태우-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이었던 김윤환 전 의원이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날 그의 죽음은 ‘후세인의 체포’와 ‘노무현 대통령의 정계은퇴 용의’(불법자금 한나라의 10분의 1 넘으면) 소식에 가려져 달리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졌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시절 11·13·14·15대 의원을 역임했던 그는 5공 말기에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실장을 거쳐 노태우, 김영삼 정부 출범 때 정권창출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킹메이커’라는 별명도 그때 얻은 것이다. 이후 그는 여당 사무총장 두 번, 원내총무 두 번, 정무장관 세 번, 여당 대표 두 번 등을 지냈다. 97년 대선 때는 신한국당 9룡(龍) 가운데 한 명으로 대권도전에 나섰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영남후보 배제론’을 펴며 이회창 후보 지지에 나서 ‘세번째 킹메이커’에 도전했으나 이 후보가 대선에 패배, 정권창출에 실패하면서 급속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지난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불법정치자금 수뢰 혐의로 당시 이회창 총재로부터 공천을 못받자 민주국민당 창당을 통해 ‘반창(反昌)연대’를 외치며 재기에 나섰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그는 지병으로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그런데 같은 날 한나라당 이회창 전총재는 지난 대선에서 기업으로부터 500억원 가량의 불법 대선자금을 받아썼다며 대국민 사과를 한 뒤 스스로 감옥행을 자처하고 나섰다. 공교롭게도 이 전 총재가 대선자금 문제로 검찰에 자진 출두한 뒤 10분만에 ‘빈 배(虛舟·김윤환의 아호)’는 조용히 세상을 뜬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사람이 구원(舊怨)을 간직한 채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인생무상, 물극필반의 세상이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불법 대선자금 문제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있는 이때,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이른바 세도가(勢道家)들이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