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3일(제127호)

▲ 본사 대표이사 발행인

조그만 시골동네의 계(契) 장부(帳簿)가 국보급 사료라는 사실과 함께 이 장부가 소재한 마을이 경영학을 전공한 학생들의 순례지로 추진될 전망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른바 용하기(用下記)라는 이 계책(契冊)은 남평문씨의 최대 집성촌인 영암읍 장암리(일명 마당바우) 대동계 문서중 회계장부의 하나로 단순히 입출금 내역을 기록한 차원을 뛰어넘어 조선 경제 300년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놓은 사료야 얼마든지 있지만 물가의 추이를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고, 그 흐름이 조선 경제사의 흐름과 일치되는 사료는 흔치 않다는 점에서 가히 국보급이라는 게 전문가 의 진단이다.

용하기는 1741년부터 지금까지 262년간 한 해도 빠짐없이 기록, 보존돼 오면서 다른 곳의 대동계 장부와는 차별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다시말해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측면에서 세계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사료이며, 우리나라 물가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충실한 문건이라는 것이다. 특히 용하기는 서구 학계가 설정한 회계학 발달 과정상 복식부기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중기 이후 근대까지 한국의 경제상황과 경기변동을 실제 증명해 보일 수 있는 10만여 건의 각종 경제행위를 일관된 원칙에 따라 정확하게 기록한 자료로 판명되면서 국내는 물론 세계 경제사학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1992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고문서 집성 과정에서 우연찮게 발견된 용하기는 그동안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복식부기 자료로 북한 개성박물관에 소장된 송도상인 ‘사개 장부’보다 57년이 앞선다고 한다.

‘사개 장부’는 1798년부터 1820년까지 22년에 걸친 기록인 반면 용하기는 1741년 이후 지금까지 자그마치 262년에 걸친 장기간의 완전한 기록인데다 마을 대동계의 청설연대가 1668년이어서 335년의 전 기간 중 분실된 초기 자료 73년분의 일부라도 추가 확인될 경우 연대와 기간이 앞당겨지고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또 다른 흥밋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계모임 장부에 불과한 문건이 요즘시대에 와서 왜 그처럼 높이 평가되는 것인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용하기에 나타난 ‘조선 經濟史’는 문외한인 필자에게도 능히 그 가치를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용하기를 최초로 발견,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전성호씨(한국정신문화연구원)는 1713년 이후 150년 가까이 벼 1섬에 1~5냥 내외에서 등락을 거듭하던 쌀값이 19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해 1894년 13냥, 1905년 19.25냥 등 ‘초(超)인플레션’을 나타내는 것으로 파악했다. 분석결과 쌀값이 급변한 시기는 가뭄·홍수·전란과 같은 재난이 있었고, 쌀값이 안정된 시기는 평화기였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됐다. 예컨대 19세기 연속 휸년의 해는 ‘홍경래의 난’(1811년), ‘수도 서울의 쌀 폭등’(183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1894년) 등 사회적 소동이 발발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둉 선생은 이 시기를 ‘기사갑술지기’(己巳甲戌之饑)라고 표현하면서 ‘경세유표’에 “···영암의 창고에 메밀 200섬이 있었는데, 백성들이 앞을 다투다가 서로 밟혀 죽는자까지 생겨났다···”고 그 참상을 전했다고 한다.

전박사는 지난 2002년 7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국제경제사학회 총회에서 용하기 기록을 분석한 ‘조선후기 미가사(米價史)연구’ 논문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수 등 학회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그동안 서구 중심의 물가 데이터만으로 연구하던 불완전한 상황을 보환해 줄 대단한 자료라고 인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전박사에 이뤄진 연구는 방대한 용하기 자료의 일부일 뿐 앞으로 인구·도량형·토지 이용형태 등 조선의 경제생활상을 총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를 높이고 있다. 따라서 국가문화재로의 지정은 당연한 순리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