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 19일(제107호)

▲ 문배근(본사대표이사 발행인)

올 추석은 참으로 힘들고 우울한 명절이었다. 특히 농민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유난히 잦은 비 등 기상이변으로 유례없는 흉작이 예견돼 온 터에 태풍 ‘매미’가 수확을 앞둔 농촌들녘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추석절 새벽녘 이국땅에서 날아든 한 농민대표의 할복자살 소식은 농촌에 뿌리를 둔 우리 모두의 가슴을 멍울지게 했다. 연중 가장 즐거워야 할 한가위에 태풍이 휩쓸고 간 농촌의 모습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태풍이 빗겨 간 우리 영암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지만 수확을 얼마 남기지 않은 논과 밭의 벼와 과실들이 흐트러져 나뒹구는 모습들은 우리 농민들을 절망의 나락에 빠뜨렸다. 태풍이 아니더라도 세계무역기구(WTO) 농업개방 협상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하나같이 농민들을 맥빠지게 하는 내용들이다. 선진국들과 농산물 수출국들의 협공으로 인해 우리 농업의 설자리가 점차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소식이다.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회장을 지냈던 이경해씨가 목숨을 던져 세계 여론에 호소했지만 각국 대표단과 기자들조차도 자국의 이익에만 집착할 뿐 한국이 처한 농업문제는 관심 밖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농업부분 수출입을 둘러싸고 각국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상황을 비춰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만큼 세계적인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상대적으로 식량부문의 비중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어디 WTO 뿐이겠는가. 앞으로 국회에서 다뤄질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도 농민들에겐 앞날을 더욱 암담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다. 공산품의 국제경쟁력은 강하고, 농산물의 경쟁력은 약한 우리 입장에서 모든 개방은 농민들의 목을 조이는 형국이다. 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받아 온 농도(農道) 전남은 이제 세계 무역전쟁의 희생양으로 또다시 벼랑 끝 위기에 몰려 있는 것이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면서 물려받은 가난의 대물림은 우리 세대에도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농촌 탈출도 쉽지만은 않은 높은 장벽이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부채 때문이다. 현재 우리 농업은 그야말로 외우내환(外憂內患)의 여건에 처해 있는 상황이며, 그중에서도 농도 전남은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최악조건에 몰려 있다. 농업과 농촌 문제에 대해 임시방편으로 써온 정부의 빚 탕감과 보조금 정책등은 이제 한계를 넘어섰다. 역대 정부는 지난 10여 년간 농민과 정치권의 요구에 따라 40조 이상의 막대한 국고를 쏟아 부었다. 하지만 농업·농촌문제는 얽힌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고 농민들은 농민들대로 여전히 불만투성이다.

그런 상황에서 파도는 더욱 거세지고 암초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어느덧 거센 파도는 우리의 눈앞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발상의 근본적인 전환을 통한 획기적인 대책이 나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올 한해도 서산 끝자락에 서 있다. 하지만 고추와 참깨 등 밭작물은 잦은 비로 쭉정이만 남은 지 오래고, 사과와 배도 당도 및 생육상태가 최악의 상황에서 그마저 태풍이 휩쓸고 갔다. 수확기는 다가오지만 예년의 소득은 아예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다. IMF때보다 더 힘들다는 하소연이 단순히 푸념만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한가위처럼 넉넉하기만 했던 시골인심도 예전만 같지 않음은 사는 게 결코 예전만 같지 않다는 반증일터. 이런 농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치권은 여전히 이전투구(泥田鬪狗)에 골몰하고 있다. “정치는 시세(時勢)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면 정치의 효과를 거둘 수 없다”고 한 율곡 이이의 가르침을 정치인 그들은 기억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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