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 8일(제103호)

▲ 문배근(본사대표이사 발행인)

한 기업인의 죽음이 한반도, 아니 저 철책선 넘어 금강산까지 발칵 뒤집어 놓았다. 최근 잇따른 자살 사고 이면에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목숨을 담보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이른바 세상에 남부러울 게 없는 재벌그룹 회장의 죽음은 과역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서는가. 프랑스의 사회학자 E.뒤르켐은 자살을 세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원인별로 따져서 이기(利己)적 자살, 애타(愛他)적 자살, 무규제상태(無規制狀態:Anomie)적 자살이 있다고 했다. 이기적 자살은 과도한 개인화(個人化)를 보일 경우, 즉 어느 개인이 사회와의 결합력을 상실했거나 약화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 얼마 전까지 사회적으로 쿤 물의를 일으켰던 집단 따돌림, 즉 ‘왕따’의 경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반면에 애타적 자살은 과도한 집단화(集團化)를 보일 경우에 나타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의무감이 지나치게 강화될 때의 자살을 의미한다.

과거 특정 종교집단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집단 자살극이 이 범주에 속할 듯 싶다. 또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 정세의 변화라든지 사회 환경의 차이 혹은 도덕적 통제의 결여 때문에 자행되는 생명단절의 행위다. 정확한 자살동기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근 자신의 사무실에서 투신자살한 현대아산 이사회 정몽헌 회장의 죽음이 이에 속하지 않나 싶다. 정치권의 ‘네탓-내탓’공방이 가관이 아니다. 어쨌든 자살이란 그 원인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 당사자가 자유의사에 의해 목숨을 끊는 행위를 말한다. 기독교 문명권에서는 대체로 자살을 죄악시하고 있다.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 해서 그래왔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자살은 간단없이 자행되고 있다. 삶의 질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편해지는 세상이지만 말이다. 최근 광주·전남에서만 하루에 1·5명 꼴이 자살하고 있다는 통계수치가 나왔다. 전남지방경찰청에 접수된 숫자인 만큼 경찰에 신고 되지 않은 수치를 포함하면 이 보다 훨씬 많을 듯 싶다. 또 서울의 한 가정에서는 아들을 따라 아버지가 자살한 경우도 있었다. 학교 성적을 비관한 아들이 목숨을 끊자 이를 비관한 아버지마저 열흘만에 같은 장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생활고 때문에 어린 자식을 안고 몸을 던지는가 하면 빚 독촉에 시달려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부쩍 많아졌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이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지난 97년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던 아버지 정주영의 뒤를 이어 대북경제협력 사업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던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죽음은 실향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의 자살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80대의 한 노파가 미련 없이 죽음을 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실향민이었다.

북에 두고 온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수차에 걸쳐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했으나 번번히 무산돼 상실감이 컸던 노파는 정회장의 자살소식으로 기대치가 무너져 죽음을 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독극물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노파는 ‘화장하여 유골을 물에 띄워 보내 달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나 할까. 죽어서라도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다.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씨의 다섯째 아들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던 정몽헌 회장도 유서를 남겼다. ‘유분(遺粉)을 금강산에 뿌려달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아버지의 역점사업인 대북사업의 후계자로 나섰던 그가 부친의 유업을 잇지 못한 한(恨 )이 배어 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죽음 그리고 삶.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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