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23일(제92호)

▲ 대표이사발행인문배근

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이 없었다면 지금쯤 이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5·18 민중항쟁 23주년을 맞으며 문득 이런 의문을 던져 본다. 5·18 민중항쟁은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 그리고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 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잡았다. 5·18 민중항쟁은 당시에는 피의 진압으로 패배했지만 이후 전개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유신체제를 계승한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증거가 되었고, 나아가서는 불법적인 무력으로 전권을 찬탈한 정치군부세력을 심판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중의 자위적 무장 항쟁이 국민 저항권의 적극적 행사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5·18민중항쟁은 광주에서만 일어난게 아니었다. 전남 전역에 걸쳐 일어났다.

이렇듯 역사의 한 복판에는 언제나 ‘광주’ 아니 ‘호남’이 항상 함께 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호남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한 말)는 그 백미(白眉)라 할 것이다.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5·18민중항쟁 23주년을 맞은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의미가 큰 해였다. 그동안 폭동으로 매도돼 왔던 5·18민중항쟁이 국가기념일이 됐고 폭도로 내몰렸던 이들은 국가유공자로 명예가 회복됐으며 민주유공자예우법이 통과되고 5·18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고 맞는 첫 해이기 때문이다. 특히 참여정부가 탄생한 올해는 온 국민통합과 국민의 염원인 평화와 통일의 전령사로 5·18이 또다시 부활하는 순간이다. 우연찮게도 5공 청문회 스타 노무현이 참여정부의 대통령으로 다시 광주를 찾게 됐고, 그 이전 노풍의 진원지, 광주는 또다른 역사를 기록했다. (광주의 K의원은 ‘若無湖南 是無國家’를 빗대어 ‘若無光州 是無盧風’ = 만약 광주가 없었다면 노풍은 없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5·18 23주년이 갖는 의미는 현직 대통령으로는 두 번째로 5·18 기념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의 기념사에서 잘 나타나 있다. 노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5·18 정신을 계승, 개혁과 통합의 새 시대를 열어갈 것이며 분열과 대립을 극복, 국민통합을 이뤄낼 것” 이라는 발언은 성년을 훨씬 넘은 5·18이 나가야 할 바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올 5·18을 보내면서도 여전히 씁쓸한 느낌은 감출 수 없다. 5월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어느 해보다 정치인들의 방문이 많았던 해였다. 그러나 이들의 방문을 순수하게 보는 국민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다분히 5·18을 정략적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그들의 속셈은 5월 영령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5월 그날의 공동체 정신과 숭고한 희생이 퇴색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역사적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더욱이 기념시기 열린 5·18묘지에 학생들이 진입을 시도, 경찰과 마찰을 빛은 것은 그 취지가 무엇이었더라도 정당화 될 수 없다. 학생들은 노 대통령이 미국 방문에서 보여준 행태에 분노한다고 했지만 어느 참배객의 말처럼 5월 영령들의 기일(忌日), 그것도 소위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성시되는 5·18묘지에서 학생들이 보여준 태도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5월 정신은 특정인이나 특정세력의 전리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치인들과 학생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제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맞이한 5·18은 지역 간 갈등과 분열을 해소하는 국민적자양분으로 자리매김토록 그 위상을 재정립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