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2일(제89호)

▲ 문배근(본사 대표이사·발행인)

요즘 농협개혁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입버릇처럼 나오는 이 명제는 새로울 게 없지만 관심 밖으로 돌리기엔 농업·농촌의 현실이 너무 절박하다. 국민의 정부가 막 출범할 당시에도 농협개혁은 전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었다. 산지에서 1백원하는 배추 한포기가 소비자에서 1천원을 웃도는 비합리적인 유통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김대중 정부의 단호한 의지는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농협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신용사업을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농협은 각 금융점포에까지 농산물 코너를 신설하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은 어떠한가.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조합장 선거는 타락의 도를 넘어 신판 ‘매관매직’에 다름 아니다. “4억 쓰고 떨어지느니 6억 쓰고 당선되는 게 낫다”는 말은 이제 자연스런 현상이 되고 말았다. 10만원짜리 봉투를 받은 유권자가 20만원짜리 봉투를 준 후보자에게 도장이 자연스럽게 가더라는 얘기는 예삿일이 아니다. 게다가 선거 후유증은 너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지자제 선거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조합장 선거는 마을 주민들 간 불화를 낳고 친족간에도 원수를 만드는 폐단이 발생하고 있다. 협동조합이 왜 탄생했으며 그 존립근거는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약한 처지에 있는 농민이 상부상조의 정신에 입각해 물자 등의 구매·생산·판매·소비를 협동으로 영위하는 생산자단체가 아니던가. 때문에 경제적 압박이나 중간상인의 농간을 배제하는 것이 주된 존립근거다. 그럼에도 상급조직인 중앙회는 농산물 유통·생산지도 등 본연의 경제사업을 소홀히 한 채 신용사업에 치중하는 등 돈벌이에 급급해 왔다. 그런 탓에 중앙회는 날로 비대해져 규모면에서 대형 은행들을 압도하고 있다.

수입개방이후 농가들은 벼랑 끝에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직원복지에 돈을 물 쓰듯 한 점도 농협 불신을 키운 또 다른 이유가 되고 있다. 몇 해 전 30년 근속직원이 명예퇴직금으로 4억9천만원을 챙기고 연월차수당으로 연간 1천만원대를 받은 간부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이 감사원 감사에서 밝혀지면서 농민들의 농협규탄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물론 시중은행과 경쟁하다보니 대우를 비슷하게 맞출 수 밖에 없었다는 농협측의 해명도 있었지만 농민들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다. 이처럼 중앙회가 날로 비대해진 반면 농협의 손발격인 지역의 회원농협들은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읍·면단위마다 소규모로 난립돼 있는 농협은 자본금을 까먹은 상태도 허다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업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조합원의 권익옹호는 애초부터 글러먹은 셈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장은 각종 특혜를 누리고 있다. 법적으로는 무보수 명예직이지만 경영비·기밀비 등의 명목으로 월 300만원대의 급여를 받고 있다.

여기에다 퇴직위로금 명목으로 연간 1천만원 가량의 보너스도 챙기는 실정이다. 최근 불거진 장흥지역 농협임원들의 연봉이 7천~9천만원대의 장·차관급과 맞먹는다는 얘기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또 인사권과 업무 총괄권을 쥐고 있는 조합장은 막강한 권한에 비해 법적 책임이 없다. 조합에 막대한 소실을 초래했어도 명예직이라는 이유로 잘못된 경영에 대한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는 것은 또 다른 전횡을 낳고 있다. 그렇다고 조합장이 중앙회의 견제를 받는 경우는 이젠 거의 없다. 중앙회장을 이들 회원조합장들이 선축하는 탓에 오히려 눈치를 살피는 꼴이 되었다. 지역농협 이사들의 회의수당이 턱없이 높게 책정된 것도 모두 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있으되 주인없는 농협. 언제까지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농협개혁,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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