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18일(제87호)

▲ 문배근(본사 대표이사·발행인)

 

천하를 호령하던 진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趙高)는 재상 이사(李斯)와 짜고 태자 부소(扶蘇)를 거짓 조서로 자살케 하고 호해(胡亥)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그 뒤 조고는 이사도 죽여 버리고 황제와 다름없는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조고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스스로 황제가 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신하들이 어떻게 나올지 그것이 걱정이었다. 이에 그들의 생각을 떠보기 위해 어느 날 2세 황제에게 “제가 아끼던 명마인데,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사슴을 진상했다. 2세 황제가 웃으며, “승상, 지금 농담하는 거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니, 농담이 지나치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조고는 눈을 부릅뜨고 여러 신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은 분명히 말이거늘 폐하는 어찌 사슴이라 하십니까?” 어이가 없었던 황제가 “그럼 좋소이다. 승상은 말이라 하고 짐은 사슴이라 하니, 대신들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대신들은 속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이라 하면 황제를 우롱하게 되고, 사슴이라 하면 조고의 미움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조고는 사슴을 끌고 나와 큰 소리로 말했다. “폐하와 백관들은 잘 보시오. 이것이 말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조고의 기세에 눌린 대신들은 찍소리도 못했다.

단지 몇 사람만이 겨우 사슴이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조고가 눈을 부릅뜨고 다시 대신들을 바라보자, 대신 한사람이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폐하, 이것은 사슴이 아니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다른 대신들도 황제를 외면하고 모두 “말이 맞습니다”라고 했다. 이로써 자신의 위세를 눈으로 확인한 조고는 황제를 죽이고 자영을 황제자리에 앉혔다. 다음에 그를 죽이고 황제가 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반란의 와중에 죽음을 당했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즉 어떤 목적을 위해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것을 말한다. 요즈음 ‘신호남 소외론’을 둘러싼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정부의 편중인사 논란으로 야기된 이 문제는 민주당내 신주류와 구주류, 민주당과 청와대간 공방이 계속되면서 감정대립 양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이에 질세라 한나라당에서도 급기야 음모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호남소외론을 이용해 영남을 공략하려는 고차원적인 선거 전략이 아니냐”는 것이다.

여기에 얼마전 광주지역 신문방송사 편집. 보도국장들이 국정홍보처장과의 간담회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역 언론사 국장단들이 예정된 모임을 보이콧한 까닭은 최근 정찬용 청와대 인사보좌관을 만나 충분히 지역사정을 전달한 만큼 다시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표면적인 이유야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는 ‘지역민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항의성(?) 보이콧이었다. 결국 국정홍보처장은 국장단 모임 대신 일부 신문·방송사 주필 등 원로 언론인들을 만나는 것으로 일정을 끝낸 뒤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있다. “호남지역 일부 정치인이 지역감정을 악용하고 있다”는 정찬용 인사보좌관의 발언내용이 알려지면서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일부 의원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민주당내 신·구주류의 힘 겨루기가 급기야 지역민심을 앞세운 ‘호남 소외론’으로 까지 이어지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것은 명백환 거짓이다. 그러나 세상살이에는 명백한 거짓을 참으로 우기면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도 우린 그런 류(類)의 실상을 목도(目睹)하고 있다. 힘있고 가진자들에 의해 휘둘리는 우리는 여전히 불행한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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