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28일(제81호)

▲ 문배근(본사 대표이사·발행인)

‘노블리스 오블리제’ 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고대 로마시대에 특권을 누렸던 귀족들이 그만큼 가져야 했던 ‘군역’이나 ‘세금’등의 의무를 뜻했다고 한다. 이제는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많은 힘이 있는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베풀며,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상류층의 사명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상류층에 과연 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수년전 IMF라는 수난을 당했다.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국난이었다. 그것을 야기했던 이들은 긴 세월 권력과 야합했던 재벌들과 무능한 엘리트 관료 집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국난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쳤던 이들은 애절한 사연이 담긴 장롱 속의 금반지를 꺼내들어야 했던 서민들이었다. 재벌들이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며 2세들에게 상속을 하는 상황에서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전재산을 기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시장에서 김밥을 말아 팔던 평범한 할머니며, 아주머니였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런 상황이 도대체 언제까지 되풀이돼야 하는가.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 16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3김 시대의 종언을 고하며 불운했지만 화려하게 등장한 서민 대통령 노무현을 보면서 우린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된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紙는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을 하루 앞둔 24일 ‘가난에서 대통령까지’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인내로 역경을 딛고 일어선 링컨 같은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위싱턴 포스트는 또 노 대통령에 대해 솔직하고 가식을 싫어하는 성격 등을 예로 들면서 그가 한국에서 ‘신종 정치인(New breed of politician)’이라고 소개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지적처럼 시골 산골에서 태어나 가난을 딛고 성장해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확실히 ‘신종 정치인’임에 틀림없다. 그의 정치 역정을 더듬어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가는 곳마다 왕따 당하고, 모욕당하고, 냉대 받았던 것이다.

92년 총선에서, 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96년과 2000년 총선에서도 계속 떨어졌다. 당에서도 힘없는 비주류였다. 그의 선택은 항상 올바른 선택이라고 환영을 받았지만 우리나라 정치 현실은 그를 패배자로 남겨놓았다. “정의가 승리 한다”라는 말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가식에 불과했다. 세계사의 위인으로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미국의 대통령 링컨도 한때는 매우 불운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23세 때 처음 일리노이주의원에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재수해서 주의원이 됐다. 36세때 연방하원의원에 도전할 때는 공천조차 받지 못했고, 그 후 2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1846년 우여곡절 끝에 연방하원의원에 선출된 링컨은 임기를 마친 후 대통령에 당선되는 160년까지 11년간 정치도전은 모두 실패로 점철됐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2년간 연방 하원의원을 한 것 이외는 제대로 된 중앙 정치경력이 없었다. 링컨은 한마디로 정치적 실패자였다. 그럼에도 끝내 대통령으로 성공하여 우리 문명사에 존경받는 인물로 영원히 남게 됐다. 바보 정치인이며, 왕따 정치인이었던 노무현의 화려한 등장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한번 희망을 갖는다. ‘정의가 승리 한다’는 희망을 링컨과 노무현은 확실하게 우리에게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하며,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돼야 한다. 원칙을 바로 세운 신뢰사회,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취임사를 읽어내려 가는 그의 강한 어조에서 우린 그에게서 확실하게 새로운 희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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