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15일(제67호)

본사 대표이사 발행인
제2회 산조축제가 지난 9일 아쉬움 속에 폐막됐다. 가야금 산조를 창시하여 국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김창조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이번 행사에서는 산조에 대한 의의와 가치를 정립하고자 학술회의도 함께 열렸다. 특히 이번 축제기간 중에는 한국의 정악과 일본의 고또, 중국의 고쟁·금 연주 등 국제행사가 동시에 펼쳐져 행사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작은 고을 영암에서 국내외 국악계의 거장들이 대거 참석해 열린 국제적 행사는 좀처럼 보기드문 일이다. 이는 김창조 선생의 고향이 영암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익히 아는대로 김창조 선생은 영암의 세습적 율객(律客)의 가정에서 태어나 근세 민간 기악 음악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가장 빛나는 공적을 남긴 사람이다. 1890년 진양조·중머리·중중머리·잦은머리의 틀을 갖춘 하나의 음악형식인 가야금 산조를 작곡함으로써 이 땅의 모든 산조음악의 효시가 된 것이다. 다시말해 김창조의 산조 창작은 한국문화유산 중 탁월한 가치를 지닌 예술로써 100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각 악기의 기악 독주곡으로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워오고 있다. 이번 축제에 앞서 뜻깊은 행사가 또 있었다.

인간문화재 김죽파의 영정 안치식이 축제 전날인 7일 오전 군서면 도갑사에서 있었다. 김창조 선생의 친손녀로 덕진면 영보리에서 태어난 김죽파는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민족의 정한(情恨)을 가야금 산조로 승화시킨 가야금의 큰 별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윈 죽파는 할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난 후 살아서는 한번도 고향을 찾아보지 못하고 타계했으나 이번에 80여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듯 영암의 월출산 비경(秘境)속에 가야금 산조라는 불후의 명작을 만든 김창조 선생은 친손녀 죽파와 함께 또 다른 영암출신 한성기, 김병호 명인을 배출해냈다. 따라서 영암은 누가 뭐라 해도 산조음악의 본고장으로 손색이 없다 할 것이다. 더구나 이번 행사에서는 국악사상 처음으로 김창조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강태홍류· 김병호류· 김윤덕류· 성금련류· 최옥삼류· 김죽파류등 우리나라 국악계의 태두를 이룬 가야금 산조의 6개 유파가 모두 한자리에 모여 공연함으로써 가야금 산조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매우 뜻깊은 자리였다. 때문에 이번 행사는 지역행사를 뛰어넘어 세계적인 문화행사로 발돋움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고 생각된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지역문화는 공해 없는 산업의 기본자원으로서 무한한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지역 주민의 동질성을 갖게 하는 정신문화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우리 영암도 김창조 선생이나 고죽 최경창 선생과 같은 선현들의 독창적인 고유문화와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지역경제 활성화의 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러자면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심이 절대 필요하다. 이번 행사에서도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주민들의 무관심이다.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이 누구나 한번쯤 찾아보고 싶은 문화명소로 자리매김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님을 우리 영암인 모두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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