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 24일(44호)

▲ 본사 대표이사 발행인

조직의 화합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회. 그래서 때론 개인의 존엄성마저 무시해버리는 사회. 그게 바로 집단주의로 표출되는 일본인들의 사회다. 이 집단주의의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가 종신고용제다. 종신고용제는 한번 직장에 들어가면 정년할 때까지 근무할 수 있는 제도다. 말 그대로 ‘철밥통’인 셈이다. 다소 동떨어진 개념이긴 하지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나 할까. 그런 일본사회가 언제부터인가 크게 변하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90년대초 ‘버블경제’(거품경제)가 제거되면서 기업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능력에 의한 연봉제가 일본 기업들에게 속속 도입된 것이다. 당연히 종신고용제에서 중시되던 연공서열 또한 의미가 없게 됐다.

다시말해 능력있는 사원만이 승진할 수 있고, 오래 버틸 수 있게 됐다. 반면 능력 없는 사원은 자연 도태될 수 밖에 없게 됐다. 회사에서 자신의 역량은 결국 연봉으로 표출된다. 그야말로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집단주의의 대명사 일본의 나라에 능력주의가 보편화 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 일본의 샐러리맨들은 심리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IMF(국제통화기금) 체제이후 여전히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나라. 서글픈 일이지만, 그동안 많은 분야에서 일본을 모방하며 뒤따라가는 데 급급하고 있는 게 아직까지의 현실이다. 역시 고용제도 또한 그대로 답습과정을 밟고 있다. 종신고용제를 토대로 연공서열에 무게를 두던 우리나라의 기업들도 연봉제 도입이 차츰 보편화되고 있다. 대불산업단지에 입주한 미국 투자회사 보워터 한라제지 노동조합이 18일 급기야 파업에 돌입했다.

외환위기 이후 가장 성공한 외국 투자회사로 평가받고 있는 지역의 연고기업 한라제지 노조가 파업에 돌입함으로써 지역민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노조측은 “그동안 수십차례에 걸쳐 노사협상을 벌였으나 쟁점사항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데다 사측의 불성실한 협상태도에 실망해 파업에 들어가기로 했다”고 파업배경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회사측은 “노조가 요구하는 경영권과 인사권 참여는 협상대상이 아니다”며 “파업이 장기화될 경우 직장폐쇄 등의 조치도 불사하겠다” 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대불산단에 대한 지역민들의 애정은 각별하다. 비록 입주기업들은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최소한 영암 지역민들은 그렇지 않다. 조상 대대로 물려온 생계터전을 하루아침에 내놓고 국가시책에 따랐던 지선민을 비롯한 영암 지역민들은 좀 더 다른 세상을 꿈꾸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의 대불산단에 대한 갖가지 시책과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런 대불산단이 노사갈등으로 인해 공장 하나라도 문을 닫게 되길 누가 바라겠는가. 더구나 입주환경을 악화시켜 기업들이 입주를 꺼리는 곳으로 전락된다면 더더욱 안될 말이다. 갈수록 피폐일로에 놓여있는 농촌의 실정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대불산단은 예전의 황금어장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오랫동안 묵묵히 참아온 지역민들에 대한 보상이다. 졍쟁 논리와 기업이익의 배가 수단에서 도입된 능력에 따른 연봉제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기업은 나름대로 사회적 책임도 크다. 전국 신문용지의 17%를 공급하고 지난해 267억원의 흑자를 기록한 보워터 한라제지만 보더라도 노동자들의 피땀흘린 노력의 댓가에서 나온 결과다. 때문에 사측은 오갈데 없는 사노동자에게 큰 시혜나 베푸는 듯한 인상이나 사내 정책을 펴서는 안된다. 노동자들도 과도한 요구를 자제해야 함은 물론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회사를 만드는 데 이의가 있을 순 없다. 이는 노사 양측이 한발짝 물러설 때 가능하다. 영암 지역민들은 지금 보워터한라 가족들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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