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전과 함께하는 영암역사탐구 영암의 6·25 참상,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2부)

일본인 대신 통치하러 온 미군

역사학자 김기섭 교수는 그의 저서 해방일기(디자인기획에서 2011년 출간)에서 미군을 “일본인 대신 통치하러 온 미군”이라고 표현하였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남한에 진주한 다음 날인 9월 9일 조선총독 아베로부터 항복문서에 조인을 받고, 이날 오후 총독부정문에 걸린 일장기를 내리고 그 자리에 대한민국 국기가 아닌 미국 국기인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그런데 미국의 관심은 일본에 집중되었다. 미국은 일본에서 군정을 실시하기위한 준비 작업으로 미리 약 2천명의 민정관을 양성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모든 걸 야전군사령관에게 맡겼다. (두개의 한국, 돈오버도퍼, 이종길 옮김, 재인용)

서방연합국들은 나치에 협력한 비시정부의 프랑스만이 아니라 추축국 일원이던 이탈리아에 진주하면서도 ‘점령’이 아니라 해방을 표방했다. 소련이 동유럽국가에 진주하면서도 마찬가 지였다. 이북에 대해서도 그랬다. ‘해방’이라면 진주하는 국가나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이 되기 때문에 주민들의 협조를 바랄 수 있다.
그런데 남한에서 미군은 ‘점령군’(occupying force)을 표방했다. 일본 및 독일진주에서와 같은 자세였다.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미군은 표현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점령의 방식이었다. 남한점령에 1개 군단 병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아래 오끼나와에 주둔 중이던 군단을 보냈고, 그 점령군사령관에 하지중장을 임명하였다. 하지는 군인으로서 정치를 해본 경험이 없어 1개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정치 감각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김기협의 해방일기원용)  

이에 반하여 맥아더는 일본 국민들에게 신격화되어 있는 일본 천황을 맥아더 사령부로 10여 차례나 불러 미국이 일본을 통치하는데 필요한 조치사항 및 향후 일본의 국체를 논의하는 과정을 통하여 천황을 평범한 인간으로 일본국민들에게 인식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맥아더는 “일본군주의 위치에서  군주스러움”에 취해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하지는 9일에 항복을 받고 군정을 선포한 뒤 12일에 총독과 경찰국장을 해임하고 15일에 국장급이상을 해임했다. 해임된 간부들은 미군정의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과장급이하 실무자들은 아직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미군정은 일본인들을 축출하는데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었기 때문이다.

영암에 미군이 처음 진주한 것은 1945년 11월 초순으로,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55보병중대 소속 15명의 미군이 영암에 파견되어 이들이 행정과 치안을 지휘 감독하였다.(영암군지 상권원용)

점령군은 모든 행정에 있어서 일본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일본인들은 1945년 10월까지 약 350권의 비망록을 영어로 작성하여 미 군정청에 제출하였으며, 한인 관리들을 임명할 때도 추천권을 행사하였다.
하지가 신문기자들에게 “사실 일본인이 나의 가장 신뢰할만한 정보원이다”라고 실토하였다. 이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진주하자 곧 행정 및 치안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당시 일본이 미군에 제시한 한국에 관한 정보의 주요내용은
① 한국 민의 민도는 극히 낮고 야만적인 상태에 놓여있다.(불결하고 도둑이 많다)
② 2대 정치세력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인데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의 지령을 받고 있다.
③ 한국을 통치하려면 총독부 관료체제의 도움이 필요하다 등이었다.
한국인들의 반발은 클 수밖에 없었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미군은 일본군에 이은 새로운 지배자의 자세로 한국인을 대했던 것이다. 이는 미군의 옷을 갈아입은 일제의 통치와 다를 바 없었다.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권,72-73)

하지의 한국인에 대한 그러한 태도에 대하여 미국의 관영통신마저 “한인에 대항하여 일본과 미국이 동맹을 맺는 효과를 가진 것 같았다.”고 표현하였다.
<뉴욕 타임즈> 1945년 9월 11일자 사설은 “우리는 일본의 쓰레기에는 무르고 우리가 해방시키기로 한 백성들에게는 억압적으로 대해야 한단 말인가?” 라고 물었다. 그러나 바로 그게 미국인들의 태도이자 진심이었다.

미국의 국가 이익에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중요한 나라였으며, 이는 이후 정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브루스 커밍스는 미 국무성이 국방성 소속인 하지의 정책에 대하여 “하지의 일본관리 유임정책에 대하여 강력히 반발했다.”고 말하지만, 그런 반발에 대하여 큰 무게가 실려 있는 건 아니었다.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역, 190쪽 재인용)

미군정은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남한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남한을 통치하는데 있어 1946년 1월까지 일본인의 정보에 의존하고, 자문을 받는가 하면 일본인의 행정에 의존하였다는 것은 미국의 점령정책과 무관하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미국은 한국을 “핵심적 가치가 없는 주변부 열등국가” 로 평가하면서 “소련의 팽창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 취급하였던 것이다.

미군정의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미군의 철수(맥아더는 ‘북한이 남한을 침범 할 위험은 없다.’라고 발언, 1949년 6월 29일까지 군사고문단 100여명을 잔류시키고 미군을 철수)와 에치슨라인 선언(‘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방위선밖에 있다’고 미국의 국무장관 에치슨이 1950.1.12일에 발표) 등으로 나타났고, 이는 스탈린과 김일성으로 하여금 6.25전쟁을 도발하게 하는 미국의 결정적 오류를 가져왔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6.25참전 미군병사 중에서 5만 4000여명이 전사하였다. 이러한 경우를 두고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 했나싶다.

맥아더 사령부는 1945년 9월 7일 태평양미국육군 최고지휘관  미국 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 명으로  <조선인민에 고함> 포고 제1호를 발표하였다. “북위 38도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고 하고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하며,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또는 공공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며,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고 했다.

포고 제2호에서는 “조선인으로서 포고 명령을 위반한자는 사형 등 처벌을 하겠다.” 고 경고했다. 항복식이 끝나자 하지는 총독부의 모든 기능이 그대로 존속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이는 조선인들이 여전히 일본당국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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