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림에 터 잡은 함양박씨 많은 충절인물 배출낭주최씨 시조 최흔-지몽 영암의 유력성씨 다져

 

▲ 조선시대 철종때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동여도 중에서 구림부근.
③마을유래 - 각 성씨의 씨내림

◇낭주최씨
낭주최씨는 신라 진성왕 때 사람인 최흔(崔昕)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본관지 낭주는 995년부터 1018년 사이에 22년간 쓰인 영암의 옛이름이다. 이 낭주최씨가 구림을 중심으로 영암의 유력성씨로 굳게 다진 것은 시조 최흔과 그의 아들 최지몽(907-987)이다.

최흔은 토호세력으로 왕건의 후백제 공략에 협력해 당시 고려왕실이 지방토호 세력들에게 내린 원보상(元輔相)벼슬을 받았고, 최지몽은 최흔의 활약에 힘입어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열전 최지몽조에는 지몽이 천문과 복서에 뛰어나 일찍이 고려 태조 왕건이 장차 삼한을 통일할 것이라는 해몽을 했고, 두차례 반란음모를 점쳐 고려왕실의 신임을 두텁게 받은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몽이 죽은 뒤 고려왕실의 주도권이 신라계에 넘어가자 고려중기 이후 이들은 정권 정상에서 점차 밀려나게 되었고 구림에서의 동족기반도 무너져 외지로 옮겨 간 듯 하다. 이 탓에 낭주최씨는 최지몽의 아들 현동 이후로는 세계(世系)가 전하지 않아 고려말의 사람 최희소를 1세조(世祖)로 삼고 있다.

현존 낭주최씨 실질상의 중시조는 고려말에 나주 봉황면 만봉리 용반의 도성산에 숨어들었다는 4세손 최안우(崔安雨, 1332-?)이다. 그의 손자대 4형제 후손들이 2004년 현재 2천800여세대 낭주최씨의 오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낭주최씨가 구림에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은 1세조 최희소의 13세손 최진하(崔鎭河, 1600-1673)때다. 최진하는 함양박씨 박이충의 사위이기도 한데 후손들에게 전해오는 말로는 옛 선조들이 살았던 인연으로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물론 최진하에 앞서 5세조 최운(崔雲, 1361-1420)이 난포박씨 박인철의 손자사위가 되어 구림과 인연을 맺었고 그의 아들 최양(崔樣)이 영암 금정면 한대리에서 영암읍내 남문밖으로 옮겼다. 현재 영암군내에만 200여세대, 구림리에는 80여세대가 살고 있으며 1세조 최희소로부터 27세손이, 구림에서 다시 들어온 최진하로부터는 16세손이 뿌리내리고 있다.

◇함양박씨
함양박씨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29세손 경명왕의 셋째 아들일 박언신(朴彦信)을 시조로 한다. 그러나 박언신 이후로는 문헌이 유실되어 세계가 전하지 않아 고려때 예부상서를 지낸 박선을 1세조로 하고 있다. 이 함양박씨가 구림에 처음 터를 잡은 때는 1세조 선의 10세손 오한공(五恨公) 박성건(朴成乾, 1418-1487)때이다. 오한은 본래 나주에서 살다가 장수현감을 지낸 뒤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처(선착성씨인 난포박씨 진명의 딸)의 고향인 구림에 내려와 학문에 힘쓴 사람이다. 그는 1479(성종 1)년에 간죽정(間竹亭)을 지어 주변 선비들을 가르쳤고, 경기체가인 금성별곡(錦城別曲)의 저자로 국문학상 이름난 사람이기도 하다. 슬하에 태인현감을 지낸 권(權)과 율(栗) 조(條) 계(桂) 정(楨)의 오형제를 두었고 광산이씨 진을 사위로 맞이했다. 구림에서 함양박씨들의 지위향상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오한의 손자 규정(奎精, 1493-1580)이다. 규정은 당시 동장으로 구림대동계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영암향약을 창설하고 향안을 마련하는데도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다.

더욱이 왜란을 거치는 동안 문중에서 대기, 승원, 경인, 홉, 근기 등 여러 충절인물을 낳아 동족기반을 굳게 다졌다. 함양박씨들은 구림에 터를 잡은 이후 많은 충절인물을 배출하는 등 대외적인 후손들의 활동과 선착성씨이자 외족인 난포박씨 뒤에 터를 잡은 선산임씨들과 긴밀한 유대를 가짐으로써 구림의 주도 성씨로 성장해 오늘에 이르렀다. 구림리 내에 함양박씨와 관련된 유물 유적은 간죽정과 죽정서원이 있다. 현재 500여가구가 모여 살고 있고, 1세조 선의 10세손으로 구림에 터를 잡은 오한공으로 부터 17세손이 뿌리내리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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