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성씨기행 <10> - 제주양씨편
양달사 장군 장독골샘 영암읍내 주민들 식수원 사용… 삼성혈의 神人 양을나가 시조

영암읍 서남리 5거리에 있는 장독골샘. 지금은 정자가 들어서 있지만, 을묘왜변 때 양달사 장군이 기를 꽂아 물을 솟게 했다고 해서 장독샘 또는 장군정(將軍井)이라 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영암읍내 많은 주민들은 이곳 샘물을 식수원으로 사용했다.
4300년 역사를 가진 양(梁)씨
양씨는 ‘대들보 양(梁)’자를 쓰는 양씨(梁氏)와 ‘버드나무 양(楊)’자를 쓰는 양씨(楊氏)가 있는데, 이 두 성씨는 전혀 다른 성씨로, 梁(양)씨는 ‘물양’(水, 물수변), 楊(양)씨는 ‘목양’(木, 나무목변)이라고 부른다. 이 중 梁(양)씨의 기원은 단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梁)씨의 시조인 양을나(良乙那)는 단군과 같은 시기에 제주도 한라산 기슭의 모흥혈(毛興穴, 삼성혈)에서 탄강하여 탁라국(탐라국)을 창건하였으며 그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고려 태조 때까지 탐라를 통치해왔다.(영주지). 그러므로 양씨는 가장 역사를 길게 갖는 토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양(梁)씨는 제주양씨에서 분적되었으며, 따라서 양을나를 단일 시조로 하는 동계혈족이다. 모흥혈 세 구멍에서는 양을나 외에도, 고(高)씨 시조 고을나, 부(夫)씨 시조 부을나도 태어났기 때문에 이곳을 삼성혈(三姓穴)이라 부르게 되었고, ‘모흥혈(毛興穴)’에서의 毛(모)자도 셋 건너 긋고 乙(을)자를 한 글자로서, 삼을나(三乙那)라는 뜻으로 毛(모)자를 썼다고 하며, 3성씨가 일어난(興) 곳이라 하여 모흥혈(毛興穴)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梁)씨는 문헌에 70여 본관이 전하나 2000년 조사에서는 남원,제주,청주,남양,경주 등 31개 본관이 현존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인구는 39만 명 정도로 성씨별 인구순위 25위였다. 우리 영암지역에는 제주양씨 등 14개 본관에 총 9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제주양씨가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씨는 제주도 토박이 양씨(濟梁)와 육지 양씨(陸梁)로 대별되는데, 남원양씨를 중심으로 한 육양계가 70% 정도를 차지한다. 梁(양)씨는 본래 良(양. 良乙那)씨 성을 썼으나 탐라 왕족 양탕(良宕)이 사신으로 신라를 예방했다가 사성에 의해 梁(양)씨로 개성하였다. 경덕왕 때에는 양우량(友諒)이 남원부백에 봉해졌으므로 제주에서 갈라져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시작되었고, 뒤에 충주가 분관되어 3본으로 나누어졌다. 고려말까지는 良과 梁 두 가지 성이 다 쓰였는데, 고향에 남아 있는 제양(濟梁)은 오래도록 良을 썼고, 일찍 육지로 이주한 육양(陸梁)이 먼저 梁으로 바뀌었다.

양(梁)씨의 본가 제주양씨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제주양씨의 시조는 탐라 개국설화에 나오는 삼신인(三神人) 중의 맏이인 양을나이다. 양탕 이후 후손 양순(梁洵)이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를 지낸 후 한라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양을나를 시조로 하고 양순을 중시조로 하여 관향을 제주로 삼았다. 그 후의 세계(世系)는 실전되어 각 파의 파조를 1세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제주양씨는 조선시대에 사마시 포함, 50여 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제주양씨 인물로는 혜강공 학포 양팽손(彭孫)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능성(화순) 출신으로 중종 5년 생원시에 합격(2/100위)하고, 중종 11년 문과에 급제(3/33위)하였으며, 현량과에도 발탁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김정 등을 위하여 소두(疏頭. 연명 상소문에 맨 먼저 서명)로서 항소하였는데, 이 일로 삭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학포당을 짓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능주로 유배되어온 조광조와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냈으며, 후에 조광조가 화순에서 사약을 받고 죽자 동문수학한 문우주와 함께 조광조의 시신을 옮겨 제사 지내고 사당을 마련하였다. 김안로가 사사된 후 복관되어 용담현령을 지냈으나 곧 사임하고 다음해 58세로 죽었다. 그는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으며, 작품으로는 산수도 1점, 저서로는 학포유집 2책이 전한다. 인조 8년 김장생 등의 청으로 능주 죽수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순조 18년 순천의 용강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양응정(應鼎)은 양팽손의 아들로, 대사성을 지낸 후 처가 마을인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박뫼마을에 정착하여, 그곳은 400년 이상 제주양씨 집성촌으로 이어 오고 있다. 양산숙(山璹)은 양응정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과 함께 북상해 수원에서 활약하고, 선조에게 영남과 호남의 전세를 자세히 보고한 공으로 공조좌랑에 제수되었고,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끝까지 싸우다가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그리고 담양의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山甫)는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실각하자 고향 담양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짓고, 세속적인 것과는 거리를 멀리하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양회일(會一)은 능주(화순)출신 한말 의병장이다. 의병을 모아 능주,화순,동복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하였으며, 광주,장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단식 7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가 양한묵(漢默)은 해남 옥천 출신으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제주양씨는 2000년 조사에서 13만3천355명으로 나타나 전체 양(梁)씨의 3분의1을 차지했으며, 우리 영암의 제주양씨는 798명으로 영암 전체 양(梁)씨의 8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영암 양(梁)씨 중에는 특별히 제주양씨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도별로는 광주 1만6천41명, 전남 1만8천148명, 제주 2만1천379명으로 타 시도에 비해 광주,전남과 제주도에 특별히 많이 살고 있다. 집성촌도 주로 제주도와 광주,전남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데 그중에서도 남제주군 남원면, 북제주군 애월면, 전남 화순 등을 들 수 있으며, 우리 영암지역에는 도포면 봉호리 1,2구에 과거 100여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60여호가 살고 있다. 그리고 학산면 은곡리에도 과거에는 많은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으나 지금은 몇가구가 안되며, 덕진면 노송리와 금산마을에도 집성촌을 이루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영암의 입향조는 흥효 선생이며, 주부공파와 종부정공파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양달사와 장독골샘

80년대만 해도 영암읍내 서남리 삼거리에 '장독골샘'이란 우물이 있었다. 장독이라함은 군인들 기(旗)중 장군 표지기를 이르는 것으로, 을묘왜변 때 양달사 장군이 그의 기를 꽂아 물을 솟게 했다고 해서 장독샘 또는 장군정(將軍井)이라 했다. 양달사는 제주 주부(濟州主簿)를 지낸 양승조와 청주한씨 사이에서 1519년 도포면 봉호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해남 현감을 지냈다가 1555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관직을 버리고 시묘를 위해 고향에 돌아왔다. 이 무렵 왜구들은 제주를 노략질하고 1555년 5월 60여척의 병선을 이끌고 달양진에 들어와 그 위세가 대단했다. 이 때문에 당시 영암군수 이덕견은 싸움다운 싸움도 해보지 않고 항복해버려 며칠사이에 영암군 관아가 그들의 발길에 짓밟히게 됐다. 영암읍에서 9km거리에 있는 봉호정(鳳湖亭)에 귀향해 있던 양달사는 이 비보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상중(喪中)의 몸이라 어쩔바를 몰랐던 그는 사촌동생으로 부제학의 자리에 있던 양서정에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상의했다.
양서정 부제학은 "충효일체(忠孝一體)라 하거늘 어찌 이 난리를 보고만 있으려 합니까"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즉시 형 달수, 동생 달해 및 달초와 더불어 의병을 모집해 영암읍으로 향했다. 이미 왜구가 읍내 주변으로 들어와 있으므로 이들과 3일간이나 격전을 벌였다.
당시 관군(官軍)은 완산부윤(完山府尹)으로 있던 이윤경이 인솔했다. 전쟁터에는 물이 없었다. 연 3일간의 격전 끝에 적에게 포위되어 군량미가 떨어지고 음료수가 고갈되어 큰 혼란과 굶주림과 갈증을 겪게 되었다. 군사들의 동태를 살피던 양장군은 군령기를 높이 들고 한번 호령한 뒤 땅을 내리찍자 신기하게도 「쾅」소리와 함께 군령기를 찍었던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너무나 뜻밖의 광경을 바라보던 군사들은 함성을 올리며 솟아오르는 물로 갈증을 달래고 사기가 충천하여 수 많은 외적을 섬멸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샘을 '장독골샘'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 샘물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암읍내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다
한편 이 왜변은 양장군의 창의군 활약에 힘입에 진압했으나, 자신은 상중의 몸으로 출전한 것이라 관군을 이끌었던 이윤경에 그 공을 모두 돌렸다, 결국 이윤경은 그 공으로 전라감사가 됐고 뒤에 병조판서까지 됐다. 양장군은 이 전쟁때 등에 창을 찔렸는데 고향에 돌아가 3년 시묘를 마친 뒤 결국 부상당한 여독을 뿌리뽑지 못해 41세 되던 1559년 죽었다. 뒤에야 이 사실이 알려져 죽은 뒤 100년만인 현종때 좌승지로 추증됐고 충신으로 정려했다.
    문태영 객원기자(네이버 명예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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