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배근본사 대표이사·발행인
성난 농심(農心)이 또 하늘을 찌르고 있다. 한미FTA(자유무역협정)를 저지하려는 몸부림이 22일 전국의 길바닥을 메웠다. 서울 한복판에서도 농민들의 절규는 온 종일 하늘을 메아리쳤다. 일년에 몇 억씩 아파트 값이 올라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하는 서울사람들에겐 볼썽사나운 모습이었을 터이지만, 그들의 몸부림은 곧 사즉생(死卽生)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몸을 던져 저항해보지만 돌아온 건 역시 상처뿐. 바람에 흩날려 나뒹구는 낙엽의 신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늦가을 스산한 바람은 더욱 추위를 안겨준다.

이튿날, 중앙일간지의 한 광고면이 눈에 띈다. “대한민국에서 농민의 삶은 천형(天刑)입니까?” 그렇다. 농민들도 분명코, 대한민국의 국민인데 왜 정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가.

일년 농사를 다 짓고 난 이 무렵, 수확의 기쁨 보다는 내일을 걱정하며 길거리 투쟁에 나서야 하는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던가. 요즈음, 서울 집값 잡겠다고 부산떠는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인 현실. 과연 농촌의 농민들은 서울 사람들의 ‘들러리’ 인생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농민들은 주장하고 있다. 한때는 상공업 중심 개발정책의 희생양으로 삼고, 90년대 이후에는 무차별적인 농축산물 수입개방으로 농업보호 정책을 폐기하더니 이제 마침내 정부는 한미FTA 체결을 통해 농업 포기선언을 하려 한다고...

사실, 농촌에서 대물림 해가며 뼈 빠지게 고생해봤자 평생 몇 억 손에 쥔다는 게 힘든 것이 오늘의 농촌현실이다. 그런데 서울에선 일년에 몇 억씩 아파트 값이 오른다는 것이다. 툭하면 신도시를 만들겠다는 것도 바로 천정부지(天井不知)로 치솟는 집값을 잡겠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던가. 물론 서울에서도 일부 계층에 국한된 얘기일 터이지만, 농촌사람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어찌 말로 다 형언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자식만큼은 농사일을 시키지 않겠다며 도시로 훌쩍 떠난 사람들은 그래도 낫다. 비록 리어카를 끌고 날품팔이 신세였어도 지금 그들의 모습은 어떤가. 한때 고생은 했을지라도 자식에게 농사를 대물림하지 않은 사실 하나만이라도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똑같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면서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한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일인 것이다. 그만큼 농촌의 현실은 암담할 뿐이다.

엊그제 벌어진 농민들의 시위로 서울을 비롯한 대전·광주·청주·춘천 등지의 시민들이 몸살을 앓았지만, 어찌 그 몸살이 농민들의 아픔에 비할까. 시위과정에서 나무에 불을 지르거나 관공서 창문을 박살내고 불깡통까지 등장했다는 불미스런 소식도 들리지만, 오죽했으면 그런 격한 행동을 불사했을까.

그렇다고 폭력·불법시위가 정당화될 순 없다. 국민들의 생활에 불편을 안겨주고 생계에도 지장을 준다면 오히려 명분 없는 싸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올 한해도 어느덧, 끝자락에서 와 있다. 벽에 힘없이 달려 있는 달력이 애처로워 보인다. 다 찢겨 나가고 달랑 남아 있는 두 장의 달력은 어쩌면 지금 벼랑 끝에 서있는 우리 농민들의 모습이 아닐까. 며칠 있으면 마지막 한 장까지도 찢겨 나갈 운명인 달력. 그래도 미국의 작가 O.헨리는 ‘마지막 잎새’에서 사경을 헤매는 무명의 여류화가 존시를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갖게 했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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