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한옥의 백미(白眉)를 자랑하는 사권당(思勸堂)


 추억(追憶)

나 어릴 적, 어릴 적에

골목길 거닐며 볏단 헐어 집 지어놓고

어느 샌가 잠들었다 요란스러워 깨어보니

이웃집 아저씨들 눈비비고 나오시네


나 어릴 적, 어릴 적에

뒤돌아 쳐다보니 천황봉 봉우리에

붉게 타는 태양이 그 자태 뽐내듯

살포시 앉아있네


나 어릴 적, 어릴 적에

일찍 집으로 가니

곱고 고운 우리 엄니 머리에 수건 쓰고

아궁이에 장작 모아 말없이 아침밥 지으시네


- 송암(松岩) 김선민 (전국국악협회 영암군지부장)

 

광산김씨 문각인 사권당(思勸堂)은 모정마을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삼효자문인 세현문(世顯門)과 그 쪽문인 서현문(瑞顯門)이 있고, 동편에는 삼효자를 모시는 사당인 모효사(慕孝社)로 통하는 송효문(頌孝門)이 있다. 세현문을 통과하면 웅장하면서도 단아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사권당이 반갑게 맞이한다. 이 집은 광산김씨 원정공파의 후예인 김용채(金容彩)가 그의 부친인 성촌 김현수(醒村 金顯洙)의 뜻을 받들어 제족과 힘을 합해 건립한 것이다. 건립 연대는 상량문에 ‘盤古五化元始十一萬八千六百八十九年庚午(반고오화원시십일만팔천육백십구년경오)’라고 적혀 있다.

건물 내부에는 ‘사권당상량문’을 비롯 ‘사권당기’, ‘사권당원운’,’운차(韻次)‘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건축 형태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이다. 중앙 2칸은 대청이고, 양 측면 2칸은 재실로 되어 있다. 건물에 있는 모든 세살창호문은 비틀어 위로 걸 수 있게 되어있으며, 문을 들어 올리면 집 전체의 내부가 텅 빈 정자와 같이 된다.


   사권당 건축 내력
마을 주민 김학수씨(87)는 사권당을 지을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 ▼사권당의 독특한 툇마루 - 사권당은 앞, 옆, 뒤 사방에 툇마루를 두고 있다.
“용산리 뒤편 주지봉 기슭에 광산김씨 선산이 있는데, 그 곳에서 소나무를 베어 목재를 마련했다. 모정마을에서 용산리 뒷산까지는 약 6km의 거리이다. 이 먼 거리를 온 동네 청년들이 목도로 나무를 운반했지. 서까래 뿐만 아니라 기둥과 대들보까지 일일이 목도로 운반한 것이제. 그 광경을 목격한 구림마을 주민들은 ‘모정 광산김씨들은 호랑이도 때려잡을 사람들이다.’라고 혀를 내둘렀지. 아무리 젊은 장정들이라고는 하나 주먹밥 하나씩 먹고 그 무거운 목재를 목도로 들어 나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나? 어떤 청년은 배고프다고 밭두렁에 털썩 주저앉아서 울기도 했었제.

그렇게 해서 운반해온 소나무를 마을 사람들은 왕겨를 태운 연기로 찐을 뺐지. 이른바 훈증을 한 것이제. 그래서 그런 지, 사권당은 지은 지 80년이 넘도록 좀 하나 먹은 것이 없고 목재하나 틀어진 것이 없어. 전국에서 이름난 대목을 모셔와 치목을 하는 동안, 월출산 도갑사에 가서 돌을 캐어 마을까지 실어왔제. 다행히 구림마을에 말 구르마(수레)가 한 대 있어서 그 수레에 실어올 수 있었제. 석수들이 돌을 다듬는 한 편, 지금 폐교 터 아래에 기와를 굽는 공장을 차려 직접 기와를 구웠지. 집에 쓰일 장석들은 대장간을 만들어 유명한 대장장이를 모셔다가 생산했고. 일꾼들 식사는 당번을 정하여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담당했제. 사권당을 짓는 공사는 무려 3년이나 걸렸어. 큰 공사였제. 보통 공력이 들어간 집이 아니여, 자세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사방이 툇마루로 둘러싸인 독특한 한옥
사권당은 사방으로 툇마루가 나있다. 앞 툇마루, 옆 툇마루뿐만 아니라 뒤 툇마루까지 나있다. 툇마루를 통하여 집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이렇게 사방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 한옥을 요즘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한옥의 생명은 툇마루에 있다. 툇마루가 없는 집은 엄밀히 말해서 ‘한옥’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툇마루는 단순한 통로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툇마루는 집 안과 집 밖을 연결해주는 중간지대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를 잡아주어 집이 틀어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툇마루는 바로 “여유”이다. 툇마루에 서서 마당을 바라보고, 먼 산을 바라보고,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밤하늘의 달과 별을 바라보는 일은 그 자체로 여유로움이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과는 아주 다른 느낌을 가져다준다. 방안에서 유리창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 정적이라면 툇마루에서 기둥 사이로 세상을 보는 것은 동적이다. 대기의 흐름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으며, 따라서 그 만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무더운 여름날 한 손에 부채를 든 채 목침을 베고 마루에 누워 있노라면 저절로 더위가 가신다. 마룻바닥에서 풍기는 넉넉함 또한 툇마루가 주는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열린 공간이자 넉넉한 인심이 오가는 곳이었다.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툇마루는 그 사람을 끌어들인다.

주인이 없어도 툇마루는 지나가는 길손에게 정겨운 말을 건넨다, ‘이리 와서 잠시 쉬었다 가시오’라고. 사실 거지나 동냥치들도 이 툇마루에 앉아서 밥을 얻어먹고 가곤 했다. 또한 툇마루는 아버지가 동네 아저씨들과 함께 척 걸터앉아 물천회 안주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던 바깥 거실이기도 했다. 특히 추운 겨울날에 남향의 툇마루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찐 고구마를 먹던 경험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광주 이남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최고의 한옥
▲ 광주 이남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최고의 한옥으로 3년이나 걸려 지었다는 모정리 광산 김씨 문각 사권당 전경
3년 전 모정마을에 한옥민박집인 월인당을 지은 이용채(74) 도편수는 세현문과 사권당을 둘러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목수 생활을 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광주 이남지역에서 이렇게 잘 지어진 한옥을 본 적이 없다. 관청도 아닌 일개 문중에서 어떻게 이렇게 멋지고 훌륭한 집을 지을 수 있는 지 상상이 잘 안 된다. 천재 목수가 지은 집이다. 특히 세현문은 공법이 독특하다. 문화재급에서도 최상급의 문화재이다. 이런 집은 빨리 문화재로 등록하여 잘 보존해야 한다.” 이용채 도편수는 지금의 강진 다산초당을 지었던 분이다.

한편 3년 전에 사권당에 도둑이 들어 고서(古書) 58권이나 훔쳐간 사건이 발생했다. 도둑맞은 고서 중에는 율곡 이이 선생과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문집이 수 십 권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 잃어버린 고서들은 필사본이긴 하지만, 연대가 수 백 년 된 것들이다. 다행스럽게도 삼효자문과 관련된 상소문과 교지 등 중요 문서는 따로 보관해 놓았기 때문에 보존할 수 있었다. 종손 일족인 송암 김선민씨(61)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호남 유림들의 제청으로 성균관장의 재가를 받아 세 분 삼효자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인 모효사(慕孝社)가 단칸이라서 제사를 모시기에 너무 비좁다. 그래서 3칸 짜리 사당으로 신축을 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서호면 송산리에 있는 효자문까지 합하면 4효자가 우리 문중에서 나왔다. 모정마을 아니고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모효사를 새로 건립할 때 효자문과 관련된 문서와 문중에 보관되어 있는 여러 기록물들을 보관할 수 있는 기념관도 마련할 계획이다. 세현문과 모효사 주변을 정비하여 ”효(孝) 공원“을 조성했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다. 요즈음과 같이 효 정신이 희박해져가고 있는 각박한 세상에서 이런 효 공원을 조성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라 믿는다.”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