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점 수 (·시종면 지역기자)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 어록 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 목포 앞바다의 작은섬 하의도 후광이라는 부락에서 가난한 소농부 아들로 아버지 김윤식, 어머니 장수금 부부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활력이 강하고 교육열이 남다른 어머님 열성에 목포시내로 이사해 명문중을 나와 목포상고를 수석으로 졸업, 일제 강제징집을 피해 대학진학을 포기한 김대중은 목포상선에 취업해 사업수완을 발휘하고 있던 중 차용애 여사와 결혼, 슬하에 홍일·홍업 두 아들을 둔 채 1960년 아내와 사별하고 말았다. 그 후 1961년 제5대 민의원에 당선, 정치에 입문하였다. 1962년 이희오 여사와 결혼하여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건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대중은 경쟁자인 김영삼 후보를 상대로 대역전극을 펼치며 후보로 지명됐다. 이듬해 대선에서 투표율 46%, 95만표차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패배, 정권을 내줬다. 하지만 결과는 김 전대통령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1971년 교통사고를 위장한 살해 기도를 간신히 모면했지만 이 사고로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고, 일본 도쿄에서 대낮에 납치를 당한 이후 가택연금과 투옥 석방을 되풀이하였다.

1980년 봄 사형선고를 받은 뒤 끝내 망명길에 오른다. 1987년 야권단일화에 실패한 김대중은 두 번째 대권에 낙방하고 1992년 세 번째 도전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고배를 마시고 정계은퇴 선언을 하였다.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희망으로 불리던 사람 김대중 전 대통령. 그로부터 2년 후 비판을 무릅쓰고 정계에 복귀, 김종필과 연합하여 마침내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현정사상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하였다.

당선 직후 김대중 전대통령은 IMF 위기극복을 했고 햇볕정책으로 대북포용정책을 추진하여 북한과 물꼬를 트기위해 노력했고 2000년 6월 분단의 아픔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또한 노벨평화상을 수상, 한국의 인물이 아닌 전 세계적인 인물이요, 인권신장의 전 세계에 알렸던 것이었다.

당신의 인생항로는 온 국민이 알고 전 세계가 알고 날아가는 새들도 아는 당신, 이제 모든 걸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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