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배근(본사 대표이사·발행인)
장맛비가 농민들을 또다시 지치게 한다. 오랜 가뭄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이제 다시 비와의 전쟁을 치르며 하루하루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지난 7일에 이어 일주 일만에 강풍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집중호우가 쏟아지면서 애써 가꾼 농작물을 언제 덮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16일 오전 현재 영암지역에선 1천435㏊에 이르는 농경지가 침수됐고 제방붕괴, 도로침수, 주택파손 등의 피해와 축사침수로 인한 가축폐사, 자동차 침수 등의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타 지역에 비하면 그리 많은 피해라고 볼 순 없지만, 개별 농가의 입장에선 상당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지긋지긋한 농촌생활에 긴 한숨이 절로 날만 하다.

이처럼 농촌의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농촌 사람들에게 지난 13일 유럽을 순방중인 이명박 대통령이 큰 선물(?)을 안겨줬다. 2년여 간 끌어온 한국과 유럽연합(EU)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된 것이다. 마치 큰일을 해낸 것처럼 환한 웃음을 지어보인 이명박 대통령의 얼굴에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자회견에서 “한·EU FTA의 모든 잔여 쟁점에 대한 최종 합의안이 도출됐다”며 “이를 환영하며 기쁘게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비친 이명박 대통령의 환한 얼굴을 보고 농촌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특히 한·EU간 FTA 타결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될 축산 농가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많이 부각된 언론 탓에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아니면, 그동안 수없이 많은 국가와의 협상에서 빗장이 풀린 탓에 신경이 무뎌진 건 아닌지, 자못 궁금하다.

어쨌든, 국내 축산 농가들은 유럽산 축산·낙농시장 개방으로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하게 됐다. 대표적인 예상품목은 돼지고기와 낙농품이 거론된다. 유럽이 낙농제품의 생산기술과 품질 면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 상반기 중 FTA가 공식 발효되면 피해 정도가 피부에 와닿겠지만, 정부 측에선 한-EU간 자유무역협정에 따른 국내 농축산업의 피해 규모를 2천300여억원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 같다.

2002년 칠레와의 FTA를 맺은 이래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미국·EU·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인도 등 전 세계 44개국과 FTA협상을 체결했거나 협상을 타결했다고 한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지역적으로 미주·유럽·아시아를 망라하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까지 광범위하게 자유무역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할 때마다 경쟁력을 갖추는 농업정책을 내놓곤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식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축산농가의 한숨 섞인 목소리는 예사롭지 않다. “유럽의 싼 돼지고기와 승부하려면 한국 농가들이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데 특별한 대안이 없다. 가뜩이나 빚이 많은 농가들이 이자와 원금을 매달 갚고 나면 시설투자 등에 쓸 돈은 마련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환한 웃음 뒤에 시름에 빠져든 농가들의 한 숨이 장맛비 속에 묻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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