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서호면 학파농장서호면과 군서면 2개면에 걸쳐 있는 학파농장은 무송 현준호씨(1889~1950)가 1943년 서호면 성재리에서 양장리까지 1.2km의 제방공사를 쌓아 만든 덧으로 280여만평에 이른다.한때는 800여 세대가 이곳 학파농장에서 생계를 이어갔다.
1970년대 서호면 대섬30년 전까지 서호면 성재리에는 목포와 해창간을 왕래하는 배가 있었다. 1944년 만든 학파방조제로 갯골이 차단되기 전에는 군서면 구림리 상대포까지 뱃길이 열려 있어 영암사람들은 목포를 갈 때 성재포구를 이용하기도 했다.
영암-구림간 지방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선인동(신등)마을 김정열씨 집 뒤편 공터에 5기,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50m 떨어진 논둑에 1기 등 총 6기의 지석묘가 있다. 지방도로와는 25m 거리이며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성양 저수지가 보인다. 이 지석묘군은 북동-남서방향으로 2열을 이루고 있다.
선인동마을의 가장 남서쪽에는 지방도로와 접해서 영모각이 있는데 영모각 우측의 소로를 따라 15m 가면 우측의 박상술씨 집 마당에 4기와 양용철씨 축사 안에 1기 등 총 5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 지석묘군은 남북 1열을 이루고 있으며 양용철씨 축사 안의 지석묘는 상석이 3분의 1 가량 매몰되어 있다.
1970년대 신북면 소재지도로 양편에 즐비하게 서 있는 초가집 사이로 기와집이 듬성듬성 눈에 띈다.예로부터 신북면은 6개군의 관문으로 해양과 대륙이 연결된 서남권 산업중심 지역으로 자원이 풍부하고 교통의 요충지였다. 2000년대 신북면 소재지예전의 초가집과 기와집은 모두 사라지고 도로 양편에는 2층 이상의 건물들로 꽉 들어차 있다. 예전에 없던 아파트도 들어서 농촌도 주거문화가 많이 바뀌었고 의원과 약국 등 의료시설도 확충되었지만 인구유출은 오히려 심화되었다.
영암-구림간 지방도로에서 평리마을 입구를 지나 구림교 30여m 못미쳐 지방도로 우측의 독립된 야산에 10여기의 지석묘가 민묘와 함께 있다. 야산은 지방도로가 나면서 독립적으로 형성된 곳으로 하부는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석묘군은 동-서 1열을 이루고 있으며 대부분이 기울어져 있고 매몰되고 반파된 것도 있다. 가장 큰 지석묘 상석의 규모는 290×200×90cm 정도로 장축방향은 동-서이다.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지석이 확인된다.
구림에서 도갑사로 가는 도로를 따라 가면 도갑 저수지가 나오는데 이 저수지 150여m 못 미쳐 삼거리에 4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 지석묘는 북서-동남 방향으로 2열을 이루고 있는데, 1호 지석묘는 상석이 2단형으로 되어 있고 상석에는 성혈이 20여개 있다. 4호 지석묘의 상석에는 ‘觀音菩薩亭’이라고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기울어져 있다. 이 지석묘군 앞에는 成陽朴氏世葬山碑가 있다. 현재 죽정마을 북쪽에서 도갑사로 가는 길을 확포장공사 중인데 지석묘군이 공사구간 내에 포함되어 파괴 위험이 있다. 이 유적은 기존에 도갑리 지석묘군으로 보고된 것인데 자연마을 명에 따라 죽정 지석묘군으로 정정한다.
1960년대 신북면 월평리우시장을 중심으로 주택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신북면 월평리에 위치한 신북 우시장은 인근 시종 · 도포는 물론 나주 반남 · 왕곡 · 세지 등에서까지 소를 매매하러 다닌 사람들이 많았다.주로 소가 거래되었으나 일부 새끼 돼지도 매매되었다. 2000년대 신북면 월평리신북 우시장은 농사일이 기계화되면서 1980년이후부터 그 기능이 둔화되어 오다가 1985년 급기야 완전 폐쇄되기에이르렀다.신북면 소재지인 이곳은 현대식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고 옛날 우시장 자리는 복지회관이 신축돼 최근 준공식을 했다.
서구림리의 구림공업고등학교에서 구림 - 독천간 지방도로를 따라 400여m가면 지방도로 우측의 독립된 야산에 민묘와 함께 3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곳은 지방도로와 50m떨어진 곳이며 목지저수지 북쪽둑과 마주보고 있는 야산이다.또한 서구리리 남송정 지석묘 가군과 나군 사이에 있다.지석묘 상석은 대부분 매몰되어 하부구조는 확인할 수 없으며, 주변은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구림공업고등학교에서 구림 - 독천간 지방도로를 따라 700여m가면 지방도로 우측의 구릉상에 민묘와 함께 2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곳은 지방도로와 15m떨어진 곳이며, 주변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1호 지석묘는 지석이 3개 있으며 상석에는 성혈 10여개가 있다. 2호 지석묘는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덮여 있어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1960년대 해창만군서면 해창만은 영산강 간척사업 이전만해도 숭어, 장어, 운저리, 고막, 맛, 새우, 재첩, 석화 등 어족자원이 풍부했던 곳이다.이 때문에 동네 부녀자들은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바닷가에 나가 반나절만 고생해도 짭짤한 수입을 올릴 수 있어 큰 소득원이 됐다. 2000년대 해창만1970년대 말 무렵 바닷가의 물길이 끊기고 간척지사업이 추진되면서 영암의 특산품으로 조선시대 임금의 진상품으로 유명했던 어란도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황금어장이 농토로 바뀐 지금은 쌀농사가 푸대접을 받으면서 옛날 풍족했던 그 시절을 그립게 한다.
구림공업고등학교에서 영암 - 독천간 지방도로를 따라 600여m가면 지방도로 우측의 독립된 야산에 민묘와 함께 3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곳은 지방도로와 20m떨어진 곳이며 목지저수지와 마주보고 있다. 이 지석묘는 상석이 매몰되어 하부구조는 확인할 수 없으며, 주변은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서구림리에는 영암 - 독천간 지방도를 따라 4곳에 지석묘군이 있다. 가군은 영암 -독천간 지방도로를 따라 구림공업고등학교에서 구림 - 독천간 지방도로를 따라 300여m가면 지방도로 우측의 밭에 11기의 지석묘가 있다.이곳은 지방도로와 25m 떨어진 곳이며 동쪽으로는 왕인박사 유적지가 보인다. 이 지석묘군은 남북방향으로 1열을 이루고 있으며, 대부분의 상석이 파괴되었거나 반파되었다. 가장 큰 1호 지석묘는 지석이 2개 있으며 상석에는 지름 10cm의 성혈 5개가 확인된다.
1960년대 군서 해창다리1966년이젠에는 나룻배로 왕래했으나 그해 해창다리가 준공됨으로서 바닷길이 편리해졌다.1966년 해창교 준공식때 관내 기관장들로 보이는 인사들이 기념식을 마친 뒤 다리를 건너고 있다. 2000년대 군서 해창다리교량의 노후화로 기존의 다리는 철거되고 90년대 중후반 새로운 다리가 건설됐다.조선시대 세미(稅米)를 쌓는 곳집인 해창이 있엇다고 한다. 창말, 창촌이라고 불렸으며 고기잡이배가 들락거려 한떄는 풍요로운 곳이었다.
삼국시대 고분으로 조감마을에는 3기의 고분이 있으나 모두 훼손되어 구체적인 분형은 알 수 없다. 이중 1기는 마을의 정자가 있는데 정자를 건축하면서 파괴되어 옹관과 부장품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한 2기는 정자에서 20여m 떨어진 폐가의 담벽에 있다. 이 고분의 봉분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대부분이 삭토 되었으며 일부는 민가가 들어서면서 삭토 된 듯하다. 현재는 봉분의 일부가 폭 2m정도로 폐가의 담장으로 남아 있는데 이곳에 석실이 노출되어 있다. 남아 있는 석실의 규모는 길이 210cm, 폭은 동쪽이 97cm, 서쪽이 75cm이고 높이는 68cm이다. 또한 석실은 상당부분이 파괴되어 있으며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토유물은 합구식 옹관, 완 2점, 대부호가 있으며 수습된 유물은 전남대학교박물관에
1970년대 영암읍 역리원래 영암군 군서면 지역으로 영보역이 있어 역몰, 역촌 또는 영보역이라 했다고 한다.그러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역리라 불리면서 영암읍(면)에 편입되었다. 70년대 당시만 해도 초가집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2000년대 영암읍 역리역촌 한복판에는 관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이후 그 자리에는 정류소가 생겨 영암읍민 뿐만 아니라 영암군민들이 이용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옛날 지명의 역할을 해왔다.초가집들은 모두 현대식으로 바뀌었다.
삼국시대 고분으로 시종면 소재지에서 봉소리로 들어가는 도로는 몇 개의 구릉을 지나며 개설되어 있는데 이 도로를 따라 가면 구산저수지가 도로 북서쪽에 위치한다. 구산저수지 남동쪽의 도로변에는 조등마을과 송산마을로 가는 소로가 있다. 이 소로를 따라 100여m 가면 동쪽 구릉상에 2기의 고분이 있다. 이 구릉을 “진등”이라고 한다. 고분군의 규모는 직경 10m, 높이 2~3m의 원형분으로 석실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고 장축은 동-서방향이다. 석실은 수직에 가까우며 부정형 판석과 할석을 함께 사용하여 구축하고 천장은 두꺼운 장대석으로 덮었다. 그러나 파괴가 심하여 완전한 내부구조를 알 수 없다. 서쪽의 후벽은 북쪽 상단의 돌이 빠져 있고 남벽은 그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어 있다. 현실의
1970년대 삼호읍 나불리당초 영암군 곤일종(삼호)읍의 지역으로 나발섬(나불도)인이 되므로 나발도, 나불섬, 나불, 나불도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나불리라 불리고 있다. 개펄이 지금은 영산강 3단계 간척사업에 의해 농경지로 탈바꿈했다. 2000년대 삼호읍 나불리영암군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삼호읍은 도, 농 복합형의 영암중심지로써 관내 11개 읍,면중에서 도시화가 가장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대불산단과 현대삼호중공업이 있는 삼호읍은 최근 J프로젝트의 중심지역으로도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