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홍·영암읍 출신·광주교육대학-조선대학교 졸업·전주대학교 대학원(경영학 박사)·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사업회 이사·동강대학 교수 역임·현 호남매일 수석논설위원

재작년 어느 무덥던 여름날, 필자는 영암과 광주에 살고 있는 몇몇 고향친구들과 함께 신지도(완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에서 세상 살아가는 얘기하며 온종일 보냈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예전에 수의사로 공직생활을 했던 천성이 착하고 성실한 친구 Y는 정년퇴직이후 아파트 경비원으로 잠시 근무한 적이 있었던 고생담을 털어놓았고, 군생활 외에는 줄곧 고향에 머물러 과학영농과 축산업을 하여 자식들 대학 가르친 후 시집 장가보내고 “밥술께나 먹고 있다”는 S와 M의 새마을지도자다운 현실적인 얘기, 전국체전에서 국궁 금메달의 꿈을 안고 맹연습중이라던 K의 건재한 노익장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10년을 주기로 서울과 고향을 왕래하며 자동차 서비스사업을 하는 꽃미남 L은 향후 5개년 사업계획을 밝히면서 아직도 청운의 꿈을 잃지 않고 구구팔팔(99세까지 88하게 사는 것)할 것 같은 예감을 주었는데, 필자는 어렸을 때 ‘아이스께끼’(얼음과자)공장을 하는 이 친구네 집이 제일 부러웠었다.

은빛 모래밭이 파도에 쏠리면서 내는 소리가 10리 밖까지 울려 퍼진다하여 명사십리(鳴沙十里)라 불려진다는 청정바다에서 해수욕하고 쉰 참에 모여 앉아 술잔 건네며 막역지우(莫逆之友)의 정을 나눈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 지났다.

몇 주 전,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들 6명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필자를 보려고 일부러 광주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모처럼 고향 방면으로 놀러 온 다기에 필자가 자청하여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지 50년 동안, 언젠가 한번 본 후 처음인 것 같은 P가 근엄한 사업가로 변신해 있었고, 부모형제 잘 만나 일찍이 서울로 유학하여 일류대학에 진학해 금융계의 고위직 뱅커로 활약했던 C와 S,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있는 미국공보원에 취직하여 영어로 된 유인물을 필자에게 자주 보내주던 T는 외국유학까지 다녀와 박사가 되어 있었다.

특히 키가 훨씬 크고 잘 생겨 멋쟁이로 통했던 K-2는 준엄한 인격을 지닌 노인으로 품위가 있어 보였고, 워낙 달리기를 잘 해 제트기란 별명을 가졌던 H는 아직도 100미터 달리기 기록이 12~3초는 될 것 같은 젊은 혈기가 있어 보였다.

옛 고향 죽마고우(竹馬故友)를 만나려니 정신이 없었다. 우선 무슨 음식을 어디서 대접할 것인가. 그리고 이 친구들이 광주에서 1박할 때, 심심찮게 시간을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등 광주에 사는 ‘성근진 형’ Y, J와 함께 프로그램을 짜 보았다.

‘광주’라 하면, 우선 먹거리가 좋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필자의 단골 음식점인 한정식집에 예약하고 서울친구들을 기다리니 오후 7시30분쯤 되어 만날 수 있었다.

서울 친구들은 그 날 새벽부터 일어나 이곳저곳을 거쳐온 탓으로 다소 지쳐 보였지만, 중학교 졸업이후 50년만에 한자리에 앉아 서로 변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간담상조(肝膽相照)의 우정을 나누는데 어찌나 시간이 빨리 가던지...

서울친구 6명중 3명은 비주류였으나 분위기 메이커는 오히려 그쪽이었다. 물론 2차는 노래방이었고 비주류인 친구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었다. 다음날 필자와 친구 Y의 승용차로 지리산 노고단을 다녀온 후 버스 터미널에서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런데, 친구들을 보낸 후 개운해야 할 필자의 마음은 왠지 그렇지 않았다. 어찌된 일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들의 일상 살아가는 얘기를 터놓고 듣지 못했다는 것임을 알게 됐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아! 지난번 만났을 때, 부족한 점 이해하고, 이 다음에 만나게 되면 서울얘기 많이 들려주고 더욱 허물없이 지냈으면 고맙겠다. 늘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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