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41> 최치원과 영암

구림 상대포와 시종 남해포는 마한시대는 물론 통일신라, 고려, 조선 후기까지도 대표적인 국제항으로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 등 통일신라 최고 지식인들이 당에 왕래하면서 영암과 깊은 인연을 맺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은 신라 말기 문신인 최치원(857~908)을 기리기 위해 중국 장수성 양주시에 2007년 건립된 최치원기념관과 기념관 내 최치원 흉상.

통일신라 때 당과 교류가 활발했던 상대포

시종면 일대에 자리 잡은 고대 마한 연맹체들은 영산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국, 일본, 가야, 심지어 신라와도 활발히 교류하였다. 영산 지중해가 차지하는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함을 말해준다. 백제와 통합된 이후는 물론 통일신라 시기까지도 구림 상대포나 시종의 남해포는 여전히 국제항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장보고 출생 전설이 상대포 인근 마을에 전승되고, 월출산에 해양신앙의 하나인 철마신앙이 형성되어 있는 것은 국제항으로서 위상을 떨쳤던 옛 영광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특히 남해포의 남해신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으로 입증해주는 결정적 증거라 하겠다.

영산 지중해는 해양신앙을 중심으로 고유문화와 외래문화가 융합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 출신인 왕인박사가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한문학을 일본에 전파한 주역이라는 사실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영산 지중해를 통한 대외교류가 통일신라 시기에는 왜보다는 중국과 활발히 이루어졌다. 왜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구원군을 보낸 것과 관련이 깊다. 양국 사이의 교류는 8세기 후반 들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상대포·남해포는 국제 무역항이었다

반면 당과 신라의 관계는 나·당 전쟁을 벌이는 등 불편한 관계도 형성되었으나 698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면서 외교적으로 밀착된 관계를 형성하며 발해의 견제에 나섰다. 이 시기 울산항과 함께 대표적인 무역항이 구림의 상대포와 시종의 남해포였다. 포구로서 이들 지역의 중요성은 월출산 철마신앙, 남해신사 등의 유물유적은 물론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다음의 사료를 살펴보자.
 
 “영산강 서쪽은 무안·목포까지 흐른다. 강을 따라 내려가면 경치 좋은 마을이 많다. 강을 건너면 큰 들이 있는데 동쪽으로 광주와 경계에 닿았고, 남쪽으로는 영암과 통했다. 날씨가 화창하고 물자가 많으며, 땅이 넓어 마을이 별과 같이 깔려 있다. 또 서남쪽은 강과 바다를 통해 물자를 실어 들이는 이익이 있어 광주와 함께 이름난 고을이라 일컫는다. 나주의 서쪽은 칠산바다이다. 옛날에는 깊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모래와 앙금이 쌓여 점점 얕아져서 썰물이 빠지면 겨우 무릎이 빠질 정도이다. 한복판 한 군데 물길만이 강줄기와 같아서 배는 여기를 통해 다닌다. 나주의 서남쪽은 영암군으로 월출산 밑에 위치하였다. 월출산은 깨끗하고 수려하여 화성이 하늘에 오르는 산세이다. 산 남쪽은 월남촌이고, 서쪽은 구림촌이다. 둘 다 신라 때 이름난 마을로서 지역이 서해와 남해가 맞닿는 곳에 위치하였다. 신라에서 당나라로 조공갈 때 모두 이 고을 바닷가에서 배로 떠났다. 바닷길로 하루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흑산도에서 또 하루 가면 홍의도에 이른다. 다시 하루를 더 가면 가거도에 이르며, 북동풍을 만나 3일을 가면 태주 영파부 정해현에 도착하게 되는데, 실제로 순풍을 만나기만 하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도 있다. 남송이 고려와 통행할 때 정해현 바닷가에서 배를 출발시켜 7일 만에 고려 경계에 이르러 뭍에 올랐다는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당나라 때 신라 사람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들어간 것이 지금 통진 건널목에 배가 잇닿는 것 같았다. 그 당시에 최치원·김가기·최승우는 장삿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합격하였다. 고운은 고병의 종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4·6체의 글에 능하였는데, 지금 변려문에 기재된 황소격문이 바로 고운의 글이다. 고운은 김·최 두 사람과 더불어 종남산 절에서 신천사를 만나 내단비결이라는 책을 얻고, 후일 동국에 돌아와서 함께 수련하여 선인의 술법을 깨쳤다.”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와 있는 것으로, 당시 영암 구림이 중국과 연결되는 중요한 거점 항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이를 통해 통일신라 당시 중국과의 해상 교통로가 ‘영암 구림→흑산도→홍도→영파’로 이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파는 중국 절강성의 항구로 이곳은 해류와 바람을 통해 우리나라와 직접 바닷길로 연결됐기에 옛 마한, 백제, 통일신라 등 한반도인들의 주요 무역 거점이었다. 이곳에 신라방, 고려사관(高麗使館) 등 신라시대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비슷한 시기에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더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일본 승려 엔닌이 이용한 항로 역시 산동 반도에서 출발하여 충청도 먼바다에 이르고, 여기에 ‘고이도(신안)→거차도(진도)→안도(여수)’ 등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는 항로였으며,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 서긍이 이용한 항로 또한 ‘영파→흑산도→낙월도→위도→식도→군산도’를 이용하였다. 이렇게 살피면 통일신라 때 영암에서 출발하여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많은 사람이 이용하였음은 분명하다.

지금은 구림의 상대포나 시종의 남해포 모두 포구의 흔적만 지명에 남겼을 뿐 내륙에 있지만, 이중환이 활동한 조선 후기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항구가 국제항구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통진 나루와 빗대어 “지금 통진 건널목에 배가 잇닿는 것 같았다”라고 하는 데서 익히 알 수 있다.
 
최치원은 상대포서 당에 건너갔다

그런데 위 사료에서 주목되는 것은 통일신라 말 대표적인 학자인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 등이 이 항로를 이용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사료는 당대의 것이 아닌 조선 후기 이중환의 저술에 나오는 것이어서 그냥 믿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택리지가 자연지리와 함께 지역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다각적인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구림 상대포의 국제항 기능을 설명하며 최치원 등을 꼭 집어 언급한 것은 영암과 관련된 이들의 얘기가 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치원은 마한의 정체성을 지녔다

최치원은 삼국사기에는 경주 사량부 출신이라고 하면서도 기록이 없어져서 가계의 계통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호남 옥구 사람이라 하였고, 유명한 민속학자 이능화는 고군산군도에 아버지 최충이 고을 수령으로 왔다가 최치원을 낳았다고 하는 등 전라북도와 관련된 인물로도 나오고 있다. 그가 만약 영암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갔다면 경주보다는 옥구나 군산 출신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만약 최치원이 옥구 또는 군산 출신이라는 후대의 전승이 설득력이 있다면 최치원이 중국에 유학 간 배경 및 귀국 후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리고, 이것이 채택되지 않자 정계 은퇴를 선언한 그의 일련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마한계의 정체성이 강하게 남아 있는 이 지역 출신인 최치원은 경주 중심의 정국운영에 강력히 반발한 셈이 된다. 즉, 옛 마한지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반신라 세력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짐작된다.

최치원은 구림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최치원은 당에 왕래하면서 구림 상대포에 상당기간 머물렀을 것이다. 중국 가는 배편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고, 귀국하였을 때는 장보고의 난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바로 경주로 가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며 정국의 추이를 관망하였을 것이다. 구림에 최치원과 관련된 전승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을 법하다. 이중환이 최치원과 영암을 연결짓게 된 까닭이 아닌가 한다. 구림 출신으로 태조 왕건의 꿈 풀이를 해 준 최지몽을 비롯하여 현재도 구림에 낭주 최씨, 해주 최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도 혹시 이와 상관이 있지 않은가 억측해본다.

영암이 옛 마한시대는 물론 통일신라, 고려, 조선 후기까지도 변함없는 대표적인 국제항이었으며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 등 통일신라 최고 지식인들이 이곳을 거쳤다는 사실을 통해 이 지역의 역사적 위치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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