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ㆍ특집 특집
장례풍습 등 마한의 역사적 실체 입증자료 넘쳐나■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34>마한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하는 문헌기록(中)
영산강 유역이 마한의 중심지이자 마한역사의 시원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나 문헌 기록은 수없이 많다. 좌로부터 남해신사, 복암리 출토 토기, 금동 신발의 모습.

전라남도에서는 ‘마한 특별법’ 제정과 관련하여 마한문화권 발전을 위한 세대간 공감대 형성과 대국민 홍보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마한문화 포럼’을 9월 말에 개최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의도는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지난 주에도 마한연구원이 주관한 국제학술회의가 열려 여러 편의 논문이 발표되는 등 마한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한사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행사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한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문헌은 뜻밖에도 적지 않다. 오늘은 필자가 확인한 문헌 자료를 소개하고 다음 호에 그 의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1. 마한에 대한 첫 문헌기록

①<三國志 위서 동이전>(3세기 말 기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마한은 한(韓)에 속하며 진한·변한과 함께 삼한을 구성하였다.)
【해설】 마한이 진한 변한과 삼한을 구성하였는데, 삼한을 ‘韓’이라 하였다. 이를 가지고 일부에서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어원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이는 호사가의 추측일 따름이다.

②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중략)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늙은 노인이 세를 전하여 말하길 옛날 '秦'의 사역을 피하여 온 망명인이 '한국'에 왔다.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나누어 주었다.(중략) ㉡그 열두 나라는 '진왕'에 속하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이 하여, 대대로 잇는다.)

【해설】㉠마한이 동쪽 땅을 진한에게 떼어 주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경상도도 원래는 마한 땅이었음을 말해 준다.
㉡삼한 이전에 한반도 남쪽에는 진(辰)국이 있었다. 진국의 왕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는 마한이 삼한을 대표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삼국지』는 290년경 진수(陳壽)) 편찬하였는데, 이 책에 있는 ‘동이전’은 이 보다 약 150년 늦게 편찬된 『후한서』 동이전과 함께 한국사의 초기 역사를 살피는 데 중요하다.)

2. “삼한의 뿌리는 마한이고, 마한이 가장 강대하였다.”는 내용
 

<후한서 동이열전>(5세기 중엽 기록)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辰國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는데, 삼한 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해설】마한이 삼한 중 가장 강대하므로 마한 왕이 진왕이 되어 목지국에 도읍을 하였다. 그리고 삼한의 왕들은 모두 마한 출신이다.

<주서 열전 백제전>(6세기 초 기록)
百濟者 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 백제는 선조들이 마한에 속국으로 있었다. 부여의 별종이다.  

【해설】백제가 마한의 속국이었으며 부여의 별종이라는 주서의 내용이다. 이는 백제가 종족계통으로는 부여계통이며, 백제는 앞서 마한의 속국이었다는 내용
(※『朱書』- 638년 완성된 중국의 正史)

여기까지 살핀 결론은 ① 마한이 삼한 가운데 가장 크고 마한 왕이 삼한을 대표하는 왕이라는 내용이고, ②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 원래는 마한에 속해 있었다는 내용. 곧 한국고대사의 뿌리가 마한임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백제를 부여의 별종이라 한 것은 마한과 혈통이 다름을 말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와 마한은 근본적으로 문화 구성이 달랐다.

3. 마한 성립 시기에 대한 문헌기록

<三國志 위서 동이전>(3세기 말 기록)
(滿)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고조선 準王이 衛滿에 쫓겨 바다를 통해 韓으로 망명하여 王을 칭했다.)

【해설】고조선 준왕이 기원전 194년에 위만에 쫓겨 남쪽 韓으로 피신하는 내용이다. 이로 보아 기원전 194년에 당시 (馬)韓이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마한은 적어도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성립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마한의 성립 시기를 ‘기원후’로 보려는 경향이 남아 있다.

4. 마한사회 구조에 대한 문헌기록

<三國志 위서 동이전>(3세기 말 기록)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토착인이며, 씨를 뿌리고 양잠을 하며 베를 짠다. 각각 장수가 있는데 세력이 큰 자는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있는데, 성곽은 없다.)

【해설】마한 사람들이 유이민 집단이 아닌 토착 세력임을 알려주고 있다. 성곽이 없다는 것은 평야 지역에 있고 서로 세력이 공존하기 때문에 상호 간에 전쟁이 없었음을 알려준다.
 
5. 마한의 풍습 및 마한의 기원을 알려주는 기록<三國志 위서 동이전>

①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 ②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縣頸垂耳 不以金銀錦繡爲珍(①그 장례 풍속에 곽(槨)은 있는데 관(棺)이 없고, 소와 말을 탈 줄 몰라서 소와 말은 모두 죽어 없앤다. ②구슬을 보물로 여겨서 옷에 꿰매서 장식하기도 하고 목걸이, 귀걸이로 삼았다. 금은과 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해설】①소나 말을 장례에 사용하였다는 것은 마한사회의 순장 풍습을 알려주는 사료로 ‘복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소뼈’와 ‘광주 연산동 산정유적 소 모양 토제품’은 이러한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②‘마한인은 구슬(玉)을 금은보다 보물로 여겼다.’ 마한인은 금은 보다 옥을 중시한다는 내용인데, 영산강 유역 고분군에서 엄청난 구슬이 출토되지만 금강 이북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어 영산강 유역이 마한의 중심지이자 마한역사의 시원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라고 하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박해현  @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포토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