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읍성 조선시대 축조, 둘레 4,369척, 성안에 우물 4개나 있어
영암 의병사(10)
■임진왜란과 영암의병

시종 의홍사 김치홍 의병장 사당인 의홍사(義弘祠)는 2010년 고향인 시종면 신흥리에 건립됐다. 김치홍 의병장은 1907년 영암 의병대가 조직될 때 박사화(朴士化) 휘하의 기군장으로 활약했고, 1908년 심남일과 합류하여 강진 오치동 전투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등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심남일, 박민홍, 박사화 의병부대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여 큰 전 전과를 올렸다. 1910년 6월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폭동 및 살인·강도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순국했다. 정부는 김치홍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일본인이 본 조선의병

조선의 의병을 일본은 그들의 사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부 수뇌와 관군의 무능한 작태와는 대조적으로 조선 민중의 저항으로서 저명한 의병장만도 경상도 의령에서 기병한 곽재우, 전라도 장흥에서 기병한 고경명, 광주에서 기병한 김천일, 충청도 옥천에서 기병한 조헌, 북부 전선에서도 함경도의 정문부 부대 등이 있고, 또 휴정(서산대사) 유정(사명대사) 등이 이끄는 승병부대 등이 그러하다.

이 전쟁사를 쓴 일본인 학자는 객관성이 있는 기록을 작성하기 위하여 포르투갈 사람 루이스 푸로이스가 고니시 유키나가 등 크리스찬 장수한테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서 썼다고 하는 일본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신북 삼충각 신북면 종오리 마을에 세워진 삼충각(三忠閣)은 명량해전에서 순절한 박형준(1548~1592)과 그의 아들 박효남(1568~1592)·박호남(?~1592) 3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46년(헌종 12) 도내 유림에서 발의, 상소하여 1860년(철종 11)에 건립됐다.박형준은 예안현감으로 있을 때 군량미를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암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풀려났다. 그 후에도 계속 이곳에서 은거하다가 두 아들에게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도록 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아들과 함께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가 명량해전에서 분전하던 중 삼부자 모두 순절했다. 나라에서는 이들을 충신으로 인정하여 내려준 명정 판액(板額) 3개와 비석 3기가 있다.

그들 조선 의병은 각지에 숨어 있다가 오히하기(떼강도)가 되어 습격하고 마음대로 살육하고 일본병이 수송하는 식량을 모조리 약탈하였다.”라고 그간의 실정을 쓰고 있다. 또한 조선 수군에 대하여는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무서워 응전한 자도 없고 육지로 도망가서 사격이나 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조선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려던 일본 수군의 기도는 모두 분쇄되어 버렸다.”라고 한탄을 하였다. 거북선에 대하여는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메쿠라부테 (눈감고 덤벼드는 배)라고 하는 일종의 철갑선이다.”라고 하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의 배는 견고하고 당당하게 되어 있어 그들은 거기에다 무기·탄약·식량을 만재하고 해적이 되어 양상(洋上)을 횡행하면서 일본 배를 보기만 하면 즉각 습격하고 약탈하였다.”
“조선군은 일본군 보다 해전에 능통하여 일본군에게 다대한 손해를 가하고 이 재난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었다.”라고 전황을 말하고 “여기에서 ‘오히하기’라고 하는 것은 의병 해적이라고 하는 것은 수군을 말한다.”라고 설명하며 “일본군이 패퇴를 시작한 것은 1593년 1월 8일부터이다.”로 끝을 맺고 있다. 왜군이 평양성 전투를 고비로 패퇴하기 시작하였음을 시사한다.

임진왜란은 일본군의 완패로 끝났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요, 자백이라 하겠다. 임진왜란과 같은 외침을 겪었을 때, 호남 사람들은 호국정신으로 뭉쳐 그들을 물리쳤다. “호남이 없으면 이 나라는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호남 의병의 큰 축을 맡아온 영암 선열들은 진주성 싸움에, 금산 전투에, 명량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남원 전투와 금산 전투 등에는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의곡종사 감수관·전몽성 의병이 있는가 하면, 박대기 3부자는 금산전투 등에 참여하여 순절하였고, 박형준 3부자는 명량 해전에서 장열하게 전사를 하였으며, 전몽성·몽진 형제는 월출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영암 의병의 호국정신을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하다. 이들의 충의정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남암정(양달사기념관, 도포면 봉호정 소재), 장동사(전몽성 3형제 기념관, 서호면 장동 소재), 3충각(박형준기념관, 신북면 종오리 소재)이 있다. 한말 의병으로 김치홍(시종면) 기념관을 건립하여 추모하고 있다.
 
영암 읍성(邑城)의 축조배경과 규모

고려말 연안지역은 극심한 왜구의 침입으로 읍치가 이설되거나 아예 폐지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연해지역 주민은 유랑하게 되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변의 비옥한 토지는 방치되고, 어염 수익도 감소되어 국가적으로 막대한 손실이 되고 있었다.

이처럼 국경지대의 군사적 불안정은 사회문제를 야기했으며 이와 같은 문제의 해결방안 중 하나로 읍성 축조가 대두되었다. 읍성은 이러한 국방상의 이유로 고려 말, 조선 초에 대부분 축조되었는데, 고려 말에 전라도 지역에 축조된 읍성은 전주읍성과 장흥읍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영암읍성의 경우는 금성일기에 “의금부도사 전 선무랑 민건이 도내 영암과 만경 축성형 지심검과 영암성지에 대한 계문을 올리지 않고 성을 쌓지 않는 것에 대한 사연을 추고하는 일 및 부역 군인 중에 먼저 도망가자고 한 사람과 역군을 통솔하는 패두(牌頭)·통주(統主) 등을 추고하는 일로 2월 12일 나주에 왔다.”는 내용으로 보아 처음 축성한 것은 세종 조로 확인된다.

이후 영암읍성의 규모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문종 대이며, 당시 도체찰사 정분이 하삼도의 읍성을 살피고, 문종에게 보고하는데 둘레길이 4,369 척, 평지 높이 12척, 高險處 9척, 여장(女墻) 높이 3척, 적대(敵臺) 6개, 문은 3개인데 옹성이 없었다. 여장 길이 639척, 샘이 둘이고, 해자는 당시까지는 파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이 석성이고 둘레가 4,369척인데 이는 시굴조사 결과와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길이는 2,010m이며, 높이 15척, 성안에 우물이 4개가 있는 것으로 전한다. 영암읍성의 건축물은 객사, 작청, 군기고, 동헌, 군사(郡司), 내아, 장청, 적청(賊廳), 대월루, 훈련청, 옥, 사창이 지도에서 확인되고 있어 전라도 다른 읍성의 건축물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암지역 호구와 군인 정원

영암이 고려 성종 때 낭주로 승격되면서 전국적으로 5개 도호부의 하나인 안남도호부가 설치되었으나 23년 후 전주로 이전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 때 군사체제가 정비되면서 지방군에는 보병인 수성군과 수군인 기선군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영암지역의 호구와 군인의 정원을 살펴보면, 333호에 1,229명이며, 군은 시위군 25명, 선군 670명, 영진군 155명, 역 1개소, 봉수 2개소가 설치되었다. 이때는 종4품의 만호가 배치되었으나 이후 군 체제가 개편되어 을묘왜변 때는 종9품의 권관진으로 배속된 군인은 40명에 불과했다.<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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