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15>내비리국(內卑離國)과 자미산성(中)

반남면의 역사 ‘명문와편’ 2009년 자미산성 내부의 제7건물터 퇴적층에서 출토된 ‘반내부(半乃夫)’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암키와편. 이 명문은 현재의 반남면이 백제 때 ‘반나부리’현이었으나 통일신라 경덕왕 때 ‘반나부리’와 이름이 비슷한 ‘반남’으로 개명되어 ‘군’(郡)으로 승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미산에 환국을 개천(開天)하다

지난 호에 나주 반남지역 삼포강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자미산성이 편리한 교통에다 영산강을 아우르는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큰 정치 세력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언급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일찍부터 여러 정치 세력들이 자미산성을 주목했을 법하다. 자미산과 관련되는 전승들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세인들에게 자미산성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알아보려 한다.

자미산이 개국지지(開國之地)였다는 얘기가 전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갑자년에 천황별에서 내려오신 환인께서 죽지 않고 늙지 않는 인류를 만들기 위해 북극 오성 본에 따라 동쪽에 화순 개천산, 남쪽에 영암 월출산, 서쪽에 무안 승달산, 북쪽에 나주 다시 신걸산성을 쌓고, 중앙에 나주 반남면 자미산에 환국을 개천(開天) 개국(開國)하셨다”고 했다.

즉 자미산에 환인이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환단고기 자체를 신뢰하지는 않지만, 자미산이 개국지지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 내용은 비록 후대의 인식이기는 하나 사람들이 자미산을 개국지지로 인식할 정도로 지정학적·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미산성은 마한왕국의 왕궁터(?)

자미산의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조에는 보이지 않고 있다. 자미산 이름은 그 책이 편찬된 조선 중종 이후 언제인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미산의 이름은 언어학적으로 원래 성을 뜻하는 우리말 ‘잣’과 산을 뜻하는 우리말 ‘메·뫼·미’가 합쳐서 ‘잣뫼’라고 하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광주의 무등산 자락에 있는 무진고성이 있는 곳을 ‘잣고개’라고 부른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불린 ‘잣뫼’가 자미산으로 남게 된 것은 민간신앙과 관련이 있다. 자미산의 ‘자미’란 별자리의 이름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전체 하늘의 별자리들을 삼원과 28수(宿)의 체계로 구분하였는데, 삼원이 자미원(紫微垣), 태미원(太微垣), 천시원(天市垣)이다. 그 가운데 북쪽 하늘의 북극성을 기준으로 그 주위에 운집해 있는 성운 집단이 자미원으로 천제·태자 등의 별들이 포함되어 있다.

민간신앙에서는 자미원이 천제나 신선이 거처하는 곳으로 여기었고, 오래전부터 하늘나라 임금이 거처하는 곳은 북극의 중심에 위치한다고 여겼다. 자미궁은 임금과 왕비, 그리고 태자와 후궁 등이 사는 궁궐이라 한다. 자미산 남쪽의 봉우리를 자미봉, 북쪽 봉우리를 하늘봉이라 하는데 모두 민간신앙과 관련이 있다.

민간에서는 자미산에 황제가 거처하는 궁궐이 있었다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미 오래전에 자미산에 실제 왕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6세기 중엽까지 거의 800년 이상 영산강 유역을 지배하였던 마한왕국의 실체를 입증하고 있는 덕산리 고분군·신촌리 고분군·방두고분군·대안리고분군의 중앙에 자미산이 위치하여 이러한 추론의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자미산성은 마한왕국의 왕궁터라고 보는 것이다. 신라 왕궁인 경주 반월성 둘레가 2.5km인 것을 감안하면 700m 정도 되는 자미산성 둘레는 연맹왕국의 왕궁의 규모로 충분하다 하겠다.

나주를 대표하는 지명 ‘반나부리’

목포대 보고서에서는 자미산성 축조시기를 통일신라 무렵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면서도 백제 토기 편이 출토되고 있어 산성의 축조시기 상한을 올릴 수 있다고 하여 최종 결론은 유보하였다. 백제는 물론 고려 및 조선 시대의 유물도 상당수 수습되고 있어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산성의 기능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을 내려도 무방할 듯싶다.

목포대 보고서에서 이미 산성의 축성시기 상한선을 올릴 수 있다는 개연성을 지적하였지만 2009년 동신대 박물관이 추가로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자미산성 내부의 제7건물터 퇴적층에서 ‘반내부(半乃夫)’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암키와편이 출토되었다. 등면에 사격자문을 주 문양으로 한 집선문 사이에 방곽을 두고 그 안에 ‘半乃‥’라는 명문을 위아래로 새긴 후 횡방향으로 반복 타날해 놓았다. 같은 제7건물터 퇴적층 안에서 출토된 또 다른 암키와편은 등면에 사선문과 사격자문을 주 문양으로 한 집선문에 방곽을 두고 그 안에 ‘半乃夫‥’라는 명문을 위아래로 배치한 후 이를 횡방향으로 반복 타날해 놓았다.

자미산성에서 출토된 ‘반내부’ 명문은 자미산성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고려 인종 때 김부식이 왕명으로 편찬한 ‘삼국사기’ 지리지에 “반남군은 백제 반내부리(半奈夫里)인데, 경덕왕 때 반남군으로 고쳤다”고 나와 있다. 같은 내용이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반남폐현은 본래 백제의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인데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현으로 강등되어 나주에 예속되었다.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라고 실려 있다.

곧 현재의 반남면은 백제 때 ‘반나부리’현이었으나, 통일신라 경덕왕 때 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반나부리’와 이름이 비슷한 ‘반남’으로 개명하며 ‘군(郡)’으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고려시대에 반남 ‘郡’에서 반남 ‘縣’으로 격하시켰음을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반남현’이라 하여 명칭이나 행정구역이 고려와 변동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반남면의 역사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반남지역이 백제 때 ‘반나부리’라고 불렀다면, 자미산성 터에서 ‘반나부’라는 명문와가 출토된 사실은 적어도 자미산성의 역사는 백제 시기까지 올라갈 수 있음이 분명해졌다. 백제 때 ‘반나부리’라고 불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임도 밝혀졌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백제 때 나주에 ‘반내부리현’과 별도로 ‘발라군(發羅郡)’을 설치하였다는 사실이다. 발라군 명칭이 반나부리와 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반나부리’가 나주를 대표하였던 이름임이 분명하다. 반남지역을 뜻하는 ‘반나부리’가 나주를 대표하는 지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미산성 터에서 ‘반나부리’ 명문이 출토된 것은 이곳이 반나부리현의 치소임을 알려주고 있다. 곧 반나부리현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자미산성이 당시 정치 세력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자미산성은 백제로 통합하기 이전의 마한 연맹왕국의 중심지였을 것이라 믿어진다. 더구나 덕산리 고분·신촌리 고분 등 마한 연맹왕국을 이끈 세력들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고분군을 조영한 왕국의 왕궁이 자미산성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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