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10>지석묘 문화와 전라도 정신(中)

서호 엄길리 지석묘(사진 왼쪽)와 김해 구산동 지석묘 경남지역은 여러 마을에서 하나의 지석묘 묘역을 공유하고 있지만, 전남지역은 개별 마을마다 별도의 지석묘군을 이루고 있다. 또 경남에는 길이 10m 이상의 거대 지석묘가 보이지만, 전남에는 대부분 1∼2m의 작은 규모들이다. 즉 경남지역은 여러 촌락을 하나로 아우르는 커다란 정치체를 형성하고, 전남지역은 각기 독립된 촌락을 중심으로 작은 정치체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주말 전남지역 지석묘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영문 목포대 명예교수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고고학적 지식을 역사학과 결합하여 일반인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필자에게 여러가지 격려 이야기를 해주었다.

필자는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을 중심으로 전개된 마한의 역사가 한국 고대사의 원형임을 밝히는 것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행인 것은 차츰 일반 대중들도 ‘마한이 뭐지?’라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마을마다 분포된 전남의 지석묘군


남한 지석묘의 70% 이상이 밀집된 전남지역 지석묘군(群)은 분포 형태나 규모 면에서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어 보인다. 경남 서부권과 전남 동부권이 비슷한 문화권을 가졌다고 앞서 살폈지만, 자세히 살피면 미묘한 차이가 발견된다. 경남지역은 여러 마을에서 하나의 지석묘 묘역을 공유하고 있지만, 전남동부 지역과 득량만 일대 남해안은 개별 마을마다 별도의 지석묘군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경남지역은 여러 촌락을 하나로 아우르는 커다란 정치체를 형성하는 것이 어렵지 않아 보이지만, 전남지역은 각기 독립된 촌락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단위의 정치체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전남지역은 이처럼 소규모 정치체가 형성되어 연맹장 세력도 상대적으로 미약했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경남에는 길이 10m, 폭 4.5m, 높이 3.5m 무게 350톤 정도 되는 거대 지석묘가 보이지만, 전남에는 길이가 10m를 넘는 지석묘는 거의 없고 대부분 1∼2m의 작은 규모들이다.

이를테면 거대한 지석묘를 사용한 경남지역 연맹왕국의 정치 권력은 변한 12국의 하나인 구야국의 전신을 떠오르게 하지만, 전남은 아직 군장(Chief) 사회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소국을 생각하게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진한과 변한 24국은 대국이 4, 5천家이고 소국은 6, 7백家”라 하여 대·소국 간에 세력 차이가 커서 연맹 간의 통합작업이 활발했으나 마한지역은 역시 위지 동이전에 “대국은 만여家이나 소국은 수천家”라 하여 세력 간의 우열이 드러나지 않은 강한 분립성이 나타났다. 마한은 통합력이 미흡해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정치적 군장과 백성이 공존하는 구조

마한 54국 가운에 한 나라인 초리국 중심지인 고흥 과역면 도천리와 과역리, 남양면 중산리와 동강면 유둔리 등에 수백여 개의 지석묘가 군별로 분포되어 있다. 이처럼 밀집된 지석묘군 가운데 과역리 민등 고분군에 있는 길이 540㎝, 폭 250㎝, 높이 130㎝의 크기의 지석묘 단 1기가 규모가 가장 큰 대표적 지석묘이고, 길이 3m 정도되는 것이 군별로 2~3기, 대부분은 길이 1m 안팎 정도의 소형 지석묘이다.

지석묘 분포형태를 보면 마치 작은 지석묘들이 중앙에 있는 큰 지석묘를 감싸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규모가 가장 큰 지석묘가 있는 민등 고분군의 지석묘 조영 집단이 득량만 소국 가운데 가장 큰 정치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민등 고분군이 있는 과역리는 ‘초리’ 명칭과 관계있는 ‘조조례현’이 있는 남양면과 인접하여 굳이 행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이 초리국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강대한 세력을 가졌기에 인근 소국을 통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각 지석묘 군의 중심에 있는 규모 3m 정도의 지석묘를 통해 그곳에 소국 단계의 정치체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한편, 길이 1m 이하의 작은 지석묘는 연맹장의 묘제로 보기 어렵다. 일반 백성들의 묘제가 아닌가 한다. 이처럼 같은 곳에 집단으로 조영된 지석묘이지만, 그 규모의 차이를 통해 집단 내의 위계화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어쩌면 피장자의 신분이 각각 다른 계층들이 한 곳에 피장되어 있는 현상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마한은) 비록 수장이 있다고 하나 민간에 잡거(雜居)하여 통제력이 약하고 성곽도 없었다”라는 기록과 서로 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석묘의 토착성은 정체성의 토대

남한의 지석묘 하한이 대체로 기원전 3∼2세기로 추정되는 데 반해, 전남은 철기시대 후기로 접어들기 시작한 원삼국 시대까지도 주된 묘제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은 일반 백성들의 묘제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전남지역 지석묘군이 조영되는 말기 단계에 이르러서는 부장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는 이동희 교수의 지적은 이와 관련하여 시사적이다.

전남의 지석묘는 이처럼 토착성을 강하게 띠어 새로운 묘제가 들어와도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전남지역 동부에 새로운 묘제가 늦게 들어온 까닭이다.

여하튼, 전남지역의 지석묘 분포 양태나 규모, 그리고 존속기간을 통해 소규모 정치 세력들이 독자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 통합력이 미흡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립성은 지역이 가지고 있는 지형적 특징, 이를테면 좁은 산악지대를 굽이쳐 흐르는 보성강, 섬진강 유역에는 영산강 유역이나 해남 반도처럼 넓은 평야 지대가 없어 나타난 현상이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외부와도 단절되어 있어 새로운 문화를 접할 기회도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고, 설사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었다 하더라도 강한 토착성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강한 토착성은 고유문화를 뿌리내리게 하지만 한편으로 문화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역기능도 있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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