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해군소위로 임관해 ‘해병대 최초 4성 장군’
고향 발전에 큰 업적 남겨…공적비 건립 여론 높아

1969년 1월 1일 대장으로 승진한 제7대 해병대 사령관 시절의 강기천 장군. 이때 강 장군의 나이는 43세로 4성 장군의 첫 영예를 안았다.

영암출신으로 해병대 최초로 4성 장군에 오른 강기천 예비역 해군 대장이 11월 19일 오전 6시 별세했다. 향년 93세.

강 장군은 영암읍 회문리에서 태어나 영암공립심상소학교(현 영암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마산대학(현 경남대학교) 법정학과와 국방대학원,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법제사법위원장을 거쳐 제7대 해병대 사령관, 해군 대장, 대한석탄공사 총재, 영남화학 사장, 한국·이스라엘 친선협회 회장, 제9대 국회의원, 재향군인회 고문, 한일협력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고인은 1946년 해군 소위로 임관한 뒤 302(통영호)부장, 310(덕천호) 정장을 지낸 뒤 1952년 해병대로 전군해 해병대 제1전투단 작전참모, 해병대 5대대장을 역임했다. 특히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 참전, 제2차 중공군 대공세를 막아내며 수도 서울 북방을 지키는데 기여했다.

해병대 1사단장 재임 당시 청룡부대를 훈련시켜 최초로 파병시켰고 베트남전에서 부상을 입고 귀국하는 참전 장병과 그 가족을 위한 자활복지촌 건립을 계획했다.

1966년 제7대 해병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고인은 1969년 1월 1일 해병대 최초 대장으로 진급했다. 해병대 사령관이 대장으로 임명된 것은 고인을 시작으로 1973년까지 모두 3명에 불과하다.

특히 고인은 생전에 고향을 위해 쌓은 업적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지금의 영암중·고등학교와 영암여자중·고등학교가 있기까지는 그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1962년 영암농업고등학교가 경영난과 학생수 미달로 폐교되었지만, 이듬해 문교부를 통해 곧바로 복교 조치시키고 본관 6개 교실을 증축했는가 하면 이후에도 각종 자재와 중장비를 동원하여 2개 교실 증축과 운동장 정지작업을 도와 후배들이 공부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했다.

장학기금으로 당시 3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영암여자중고등학교는 당시 김석문 설립자가 절친한 친구인 강 장군을 부대까지 찾아와 돈이 없어 학교에도 못가는 후배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며 도움을 요청하자 남대문시장에서 밀거래되고 있는 미제 군용천막 2동을 부인을 통해 사줬다. 이를 계기로 고등공민학교가 만들어졌고 나중에 중학교 설립의 필요성에 따라 김석문 설립자는 또 강 장군에게 요청하여 여중학교 승격지원을 받아냈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에는 여고의 신설인가를 문교부 당국자에게 부탁, 관철시켰다.

학교 운동장 정지작업에도 군장비를 투입하여 적극 지원에 나서는 등 영암여중·고와도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이외에도 학산서중·독천중·신북중 증축, 독천·종남·금정동초등학교 교실 증축용 군자재 지원, 각급 학교 예산지원에 앞장섰다. 지금의 구림중학교의 경우는 당초 군서고등공민학교로 출발했으나 지역주민들의 염원을 저버릴 수가 없어 공립중학교로 승격시키는 일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 주민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특히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시절에는 영암군민의 오랜 숙원이었던 해창다리를 놓았고, 다른 곳에 들어설 삼호의 용당(목포) 비행장도 직접 영암으로 끌어와 지역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 신북·도포 등지의 저수지 보수, 도포·시종지역 전기가설, 영암읍내 상수도 설치 및 도로포장·하수구 정비, 영암 전분공장 설치인가, 도갑사 입구 교량가설, 용당-목포간 연락선 증설, 영암향교 보수, 영암재향군인회관 건립 등도 고인의 힘이 컸다.

1963년 한해로 식량이 귀할 때 구호양곡을 매월 1천석씩 특별히 배정토록 하여 굶주리는 고향 사람들이 없도록 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비만 오면 차가 못다닐 정도로 도로가 불량했던 영암-강진(풀치제) 국도정비사업과 영암-독천간 도로정비사업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 육군 공병대를 투입하여 해결했다.

군예편 후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목포·무안·신안지구 공화당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된 후에는 당초 군산에 설치키로 한 해군기지를 삼호 용당으로 유치했고 비포장도로로 엄청난 예산이 수반됐던 영암-독천간 도로를 국도로 승격시켜 확포장시켰던 장본인이다. 정계를 떠나 재야에 묻혀 살면서도 사비를 들여 영암초등학교 운동장의 스탠드 설치지원과 군립도서관에 도서를 기증하고 영암문화원 건립 때도 거액을 희사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고인의 이 같은 업적을 기려 일각에서는 공적비를 세우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김모(시종면 ·75)씨는 “생전에 고향을 위해 그토록 많은 업적을 쌓았음에도 지금까지 변변한 공적비 하나 없이 세월이 지나면서 군민들의 기억 속에 차츰 잊혀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편 고인의 유족으로는 아들 승필(서울과학기술대 교수·한국민간투자학회 회장), 딸 인선, 혜선, 승연 등 1남 3녀와 사위 이석영(유원상역 회장), 홍준(전 동양금속 회장), 김한수(개인사업·전 아식스 고문) 등이 있다. 장례는 해병대장(葬)으로 서울 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영결식은 22일 오전 7시30분에 진행되고 안장식은 오전 11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서 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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