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96>김헌창의 난과 마한 정체성 표출(下)

김헌창의 난은 참가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였다. 왕경 편에 선 삽량주 만을 제외하고 지방과 중앙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전국적 규모로 난이 일어난 것은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깊어졌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김헌창이 주의 도독이나 소경의 사신 및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에게 복속시킨 것처럼 표현되어 있으나 지리적인 여건으로 미루어 보아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사벌주(상주)나 청주(진주)는 오히려 왕경과 가깝고 반란이 일어난 웅천주(공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단순히 협박 때문에 난에 가담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오히려 거리상으로 보면, 왕경과 가까운 금관경(김해)이 난에 가담한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김헌창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난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난’이 지닌 의미를 애써 축소하여 실상을 호도하기 위해 나온 주장일 따름이라 여겨진다.

왕경인 경주와 가까운 사벌주와 금관경이 난에 가담한 것은 난의 규모와 성격을 유추해내는 데 도움을 준다. 같은 왕경 관할이라고 할 수 있는 삽량주는 난에 참여하고 있다. 같은 영남지역이지만 옛 통일 이전 신라지역의 삽량·사벌·청주 가운데 사벌과 청주 두 주는 난에 가담하였으나 삽량주는 제외되고 있다. 그런데 난에 가담하지 않은 삽량주 중앙에 섬처럼 갇혀 있는 금관경은 난에 가담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원래의 신라와 가야의 영역 가운데 왕경과 가까운 삽량주 외에는 모든 지역이 난에 참여한 셈이 된다.
 
옛 가야·백제에 대한 향수가 난의 원인

삽량주는 난에 가담하지 않았는데, 금관경이 난에 가담한 것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금관 가야계는 법흥왕 때 신라에 복속된 후, 진골귀족에 편입된 신귀족으로, 통일신라 초기에는 국왕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렇지만 경주 중심의 진골귀족으로부터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던 김유신계가 하대에 들어 정치적으로 몰락한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김유신계의 불만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불만이 옛 가야에 대한 향수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답설인귀書’로 유명한 강수는 교과서에 실려 독자들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그를 삼국사기에서는 ‘임나가야인’이라고 적고 있다. 수백 년 전에 사라진 가야 왕조에 대한 향수가 통일기에 나타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옛 왕조에 대한 향수는 앞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백제인(마한인?) 임을 강조한 진표 스님의 사례에서 백제에 대한 향수가 강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한에 대한 향수도 여전하였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견훤이 ‘마한·백제’의 전통을 계승하겠다고 하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에 대한 향수도 남아 있었다. 삼국사기에 “흥덕왕 2년(827) 3월에 고구려 승려 구덕(丘德)이 당나라에서 불경을 가져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구덕이 고구려계임을 알 수 있겠으나 굳이 ‘고구려승’이라고 하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서 멸망한 고구려 왕조에 대한 기대와 향수가 여전함을 알 수 있겠다.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와 가야계 일부에서 ‘임나왕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옛 왕조에 대한 계승의식은 고려시대에도 여전하였다. 무신정권 시대에 일어난 하층민의 반란 가운데 전남 담양에서 일어난 이연년, 경주에서 일어난 김사미·효심의 난은 각각 백제와 신라계승이 내면에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골품체제를 중심으로 경주중심의 정치가 더욱 강고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따라서 중앙과 지방, 경주와 비경주, 신라와 비신라의 갈등은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구조적인 모순이 쌓여갔다. 삼국통일에 결정적 공을 세웠던 김유신 가계조차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상황이다 보니 다른 곳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김유신의 식읍이 있었던 금관경 지역에서 가졌던 정치적 박탈감은 매우 높았을 것이다. 금관경 지역이 김헌창의 난에 동참하였던 이유라 하겠다.
 
옛 고구려계는 김헌창 난에 소극적

그런데 한산·우두주(삭주)와 북원소경(원주)은 난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난을 예측하고 군사를 일으켜 방비하였다고 되어 있다. ‘예측하고’라는 데서 사전에 김헌창과 교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경기도 여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옛 고구려 지역도 신라 중앙정부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지역이 김헌창의 난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곳에 파견된 지방관이 친 정부적 인물일 가능성과 기근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적어 불만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분석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통일 이전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서로 충돌하여 끊임없이 정치적 주도세력의 변화가 나타난 곳이었다. 마한이나 가야처럼 그 지역 고유의 정체성이 형성될 여유가 없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추론은 남원소경이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사실에서 가능하다. 지리적 위치를 고려할 때, 청주 안에 있는 서원경처럼 완산주 영역 안에 있는 남원소경은 당연히 난에 가담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혀 반란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 것은 필시 이유가 있을 법하다. 남원소경이 원래 고구려 유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세운 보덕국이 멸망한 이후 그 지역주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지역이라고 하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곧 고구려계가 대부분인 남원소경은 난이 일어났을 때 다른 지역 고구려계의 동향을 지켜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대가야계 주민들이 이주하여 형성된 국원소경(충주)은 난에 가담하였다. 이는 가야계가 난에 가담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김헌창은 일찍이 무주 도독을 역임하며 이 지역에 강고하게 형성된 마한 정체성을 주목하였을 법하다. 무주나 완산지역 주민들은 경주 중심의 정치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거기다 연속된 흉년으로 민심 이반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경주 중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신라 사회의 모순을 김헌창은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안’이라는 국호를 표방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 하였다.

지역차를 하나로 엮어내지 못한 한계성

그러나 마한계, 백제계, 가야계, 고구려계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 지역의 지향하는 바는 각각 달랐다. 말하자면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려 하였지만 각 지역이 지닌 차이를 하나로 엮으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부족하였다. 다만 국호를 ‘장안’이라 하여 중국 당과 대등한 수준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을 뿐이다.

이것만으로는 각 지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당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백제나 고구려 주민들에게 당의 서울인 ‘장안’을 국호로 삼은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헌창 군대 또한 연합군이 아니라 각기 분산된 것이어서 진압군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는 한계를 드러냈다.

마한의 정체성이 반영된 청해진 설치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신라 중앙정부는 이들 지역에 대한 정치적 유화책을 썼다. 난에 가담하다 체포된 지방세력들을 곧장 사면했다. 특히 무주지역에는 청해진과 같은 독자적 군진을 인정하였다. 1만이나 되는 군사를 동원할 힘을 부여한 것은 무주지역의 강고한 마한의 정체성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점차 상실되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후삼국 정립 기운이 나타나고 있었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