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인 덕진면 금산마을生 전 고등학교 교원 지도교수 법선당 원장

나는 덕진면 소재지에서 1㎞ 정도 떨어진 덕진포(德津浦) 나루터에 있는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형이 있는 다복한 가정이었다. 어머니는 한 여름에 나를 낳으시고 이레도 못되어 들로 나가시어 일을 하셨단다. 이제는 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 후손을 일구려 뜻을 굽히지 않는다. 지금은 영암하천에 합류되어 그 흔적마저 찾기 힘드나 덕진면 금강리 899-66번지의 하천부지에 전형적인 옛 농가가 있었다. ‘덕진나릿가’라는 호칭으로 살았다. 그것은 ‘덕진포 나루터’라는 이름이다. 그래서 1950년에서 60년대까지 나루터로 활발했던 전경이 뇌리에 생생하다.

영암읍 배날리에서 덕진면 금강리를 연결하는 나루터이다. 물 건너는 나루터로부터 상류로 약 1㎞에 덕진다리가 있었으나 돌아다니기가 너무 멀어서 물을 건너다니곤 하였다. 특히 금강리·장선리·용산리·수산리에 사는 영암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등하교시 이곳 물 건너는 나루터를 많이 이용하였다. 나의 집은 여기 외로이 있어 ‘나릿가애’라고 불리었다.

영산강하구언이 막히기 전이라서 1960년대 70년까지 바닷물이 하루에 두 차례씩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였다. 여기서 배를 타면 목포까지 갈 수 있었다. 앞에 흐르는 영암천은 깊고 커다란 강 때문에 피해도 많았다. 여름 장마철이면 밀물과 홍수가 겹치면 농토의 제방이 넘치고 무너지는 것이 매년 반복되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바닷물과 빗물이 섞이어 순식간에 수위가 높아져 물속에 잠기어버린 집을 버리고 책만 주섬주섬 안고 뒷산으로 도망하여 물난리를 피하여야 하였고, 그 때만이 학교를 결석하여야 하였다. 불행히도 당시는 자연 재해인데도 결석으로 잡아서 개근상을 몇 차례 받지 못하였다.

농경지가 많지 않아 농산물은 풍족하지 않았지만 영암천에서 잡히는 풍족한 해산물 덕분에 어느 마을보다 풍족한 삶을 누리며 살았다. 초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물고기 몰이를 위하여 볏짚으로 길게 엮어서 시랭이를 틀어매고 강에 나아가 모치 즉 숭어새끼를 몇 바게스씩 잡아 마을찬치를 하기도 하였다. 밤이면 횃불을 들고 물 빠진 강에 나아가 해산물을 잡았던 기억이 너무 재미있었다. 특히 족대라는 조그마한 그물을 들고 나가면 물고기를 한 바구니는 금방 잡았다. 장어낫이라는 기구로 갯벌을 헤치면 민물장어들이 순식간에 한 바구니씩 잡혀 나왔다. 나는 수시로 누렇게 기름기가 떠오른 장어국을 먹으며 자랐다. 그래서 지금 내가 건강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곳 덕진포 나루터를 통해 쌀을 배에 싣고 목포로 이동해 그곳 시장에 내다팔기도 하였다. 또한 신안 섬 지방에서 잡힌 수산물은 덕진포를 통해 나주 영산포·강진·영암 등 오일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을 정도로 중요한 해상 교통로가 되었다.

영산강하구언 공사 이전에는 영암천 망호리 앞까지 바닷물이 들락거렸다. 금강리 금산마을과 배날리 사이 덕진면 금강리 899-54번지에는 검은 빛의 모래사장이 아주 넓게 펼쳐 있었다. 이곳 모래사장은 전설이 하나가 전해오고 있었다. 옛날 어느 곱사가 이곳에서 모래찜질을 한 뒤 허리를 곧게 펴게 됐다고 하여 인근에서는 많은 인파가 모래찜하러 오고는 하였다. 주로 영암·나주·강진·장흥·광주 등 타지에서 모여 들었다. 바닷물이 덕진포까지 바닷물이 드나들던 때까지만 하더라도 단오절 무렵이면 여름철 내내 사람들이 찾아와 모래찜질을 즐겨하던 곳이었다.

나는 단오때면 할머니께서 나루터에서 밥집을 하셨기 때문에 모래찜하는 인파들 사이에 끼어 심부름하였다. 할머니의 음식솜씨가 좋아서 손님들이 매우 많았다. 특히 늦가을에서 겨울, 봄까지는 신안의 여러 섬에서 생산한 건어물(미역, 다시마, 말린 물고기 등)을 겨울이면 섬지방의 큰 배가 건어물을 가득 싣고 들어왔다. 건어물은 덕진포구에 있는 우리집 창고에 가득 보관하여 두고 한 달씩 숙식하며 어부들은 등짐을 지고 다니며 영암장, 신북장, 강진장, 영산포장, 나주장 등의 장터에 내다 팔았다. 어부들은 장이 서지 않는 날이면 어린 나를 배에 태워 멀리 영산강하구까지 뱃놀이 경험을 하게 하였다. 할머니께서 밥집을 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전답을 사서 지금까지 나에게 내려 주었다. 매우 감사드린다. 영산강하구언이 없었더라면 지금도 상당히 유명한 모래찜하는 유원지가 되었을 터인데 매우 아쉽다. 영산강하구언이 생기고 바닷물이 드나들지 않게 되면서 현재는 모래사장은 사라지고 흔적을 찾아보기도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영산강하구언이 생기면서 우리 마을 사람들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커다란 강이 흘렀던 곳은 현재는 작은 하천으로 바뀌었고 그 주변은 논으로 바뀌어 쌀이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갯벌이 펼쳐지는 강가의 소득은 지금의 논농사보다 훨씬 높다. 학계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생산능력은 논농사 보다는 갯벌의 생산력이 10배 이상 높다고 한다. 이제는 영산강하구언을 열어 바닷물이 들어와 자연을 살리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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