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68>마한남부 연맹의 실체를 밝혀줄 서동설화(上)

복원된 익산의 미륵사탑 백제 무왕이 만들었다는 익산의 미륵사.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은 동양 최대 규모이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에게 친숙한 서동요다. 서동설화가 마한의 실체를 밝혀줄 것이다.

‘구다라’는 백제가 아닌 ‘마한’

필자가, 본란에 ‘새로 쓰는 영산강유역 고대사’을 연재하며 그동안 우리에게 오랫동안 인식되었던 ‘백제의 마한’을 ‘마한의 백제’로 바꾸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마한사를 사랑하는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격려를 받으며, 마한사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켰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

연재의 특성을 고려하여 주제별, 시기별로 나누어 글을 쓰고 있지만, 각 내용들의 유기적인 연결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그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지만, 역사적 실체를 밝혀야 한다는 역사가의 의무감 때문에 묵묵히 원고를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2년 가까이 연재한 글 가운데 다시 읽어보아도 가장 애정이 가는 부분은 일본에서 백제를 지칭하는 ‘구다라’라는 용어가 실은 ‘마한’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힌 ‘마한의 용맹한 상징, 응준(鷹準)’을 다룬 주제였다. 말하자면 일본 고대문화의 원형은 ‘백제’가 아닌 ‘마한’ 그것도 ‘한반도 남부에 있는 마한’이었던 것이다.
 
‘응준’은 마한의 별칭이다

이 사실을 필자는 ‘매’를 뜻하는 ‘응준(鷹準)’과 마한남부 연맹 지역, 즉 영산강유역을 연결 지어 논증을 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유이민계인 백제 건국 세력이 ‘사슴’을 상징한 것과 달리, 마한 그것도 영산강유역의 마한 세력의 상징은 ‘새’ 곧, ‘매’였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며, 다시들 복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응준’이라는 유물과 연결을 지었다. 마한에서는 ‘매’를 ‘구지(具知)’라고 하고, 그 ‘구지’가 있는 ‘나라’에서 왔다하여 ‘구다라’라고 하는 표현이 형성되었음을 밝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호에서 필자가 비판한 바 있는 광주시교육청에서 지난 7월 펴낸 고등학고 역사교과서에 ‘응준’을 백제의 ‘별칭’이라고 한다는 언급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말하자면, 부여계통의 ‘남부여’를 사용한 백제 왕실과는 다른, 마한남부 연맹의 역사이자 마한의 역사를 상징해주는 ‘응준’까지도 백제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움직임을 광주시교육청이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응준’을 다룰 때,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의 로맨스를 다룬 ‘서동설화’ 얘기를 언급한 바 있다. 무왕 재위시의 상대국인 신라는, 신라 역사상 최초로 여왕인 선덕여왕 치세 기간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당 태종이 ‘女主不能’ 곧 여왕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고 비아냥거리며 흔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이러한 약점을 틈탄 백제의 무서운 공격으로 서부 요충지인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이 함락되어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피살될 정도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난국을 불력(佛力)을 통해 극복하기 위해 선덕여왕은 자장스님의 건의를 받아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웠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미 설명되었듯이 삼국유사 황룡사 찰주본기에 9층탑과 관련이 있는 인근 아홉 나라 이름이 나와 있다. 이때 필자가 주목한 것은 신라가 백제를 ‘응유(鷹遊)’라고 표현했다는 점이었다. 응류는 ‘매’를 뜻하는 ‘응준’과 같은 의미인데, 백제를 ‘응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동설화, 마한의 실체복원 가능

당시는 백제 무왕 때로, 신라는 성왕 때 새로 제정된 ‘남부여’나 원래 국호인 ‘백제’를 사용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한, 그것도 마한남부 연맹을 상징하는 ‘응준’을 사용하였다고 하는 것이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다만, 성왕 때 국호를 바꾸었다 하더라도, 그 다음 위덕왕이 중국 북제로부터 받은 책봉에서 ‘남부여왕’이 아닌 ‘백제왕’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성왕이 전사한 후 ‘남부여’라는 국호가 사실상 폐기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삼국유사에 ‘남부여(南扶餘)·전백제(前百濟)·북부여(北扶餘)’라고 하여 백제의 역사를 일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후대까지도 ‘남부여’가 ‘백제’를 대신한 새로운 국호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이 주장도 그냥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한 점에서 7세기 전반 무렵 신라가 백제를 ‘응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무왕 때 백제의 지배세력이 마한남부 연맹 세력으로 바꾸어져 있었거나,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전반까지의 마한남부 연맹의 실체는 물론 백제와의 관계를 살피는데 도움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잘 알다시피, 무왕은 의자왕의 아버지로, 무려 42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백제는 성왕이 신라 진흥왕 군대와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싸우다 전사한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성왕을 이은 위덕왕은 45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재위에 있었지만, 그 뒤의 혜왕과 법왕은 불과 2년 만에 죽는 등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혜왕을 삼국사기에는 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법왕은 삼국사기에는 혜왕의 장자라고 하였지만, 수서 동이전 백제 조에는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등 기록에 혼선이 보인다. 이러한 특이 사항을 우연으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혜왕과 법왕의 출계의 혼선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세력 간의 치열한 알력 다툼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왕이 즉위하였던 것이다. 무왕은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와 있으나 그의 출계에 대해서는 이설(異說)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서동설화에 나오는, 마를 파는 마동이 무왕이라는 설명이다. 원문의 일부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무왕<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니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障)이다.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태어났으며, 어릴 때 서동이라 하였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이름 하였다.”

우선, 무왕의 출계가 이처럼 한미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비록 삼국사기에 법왕의 아들로 나와 있지만, 실제는 한미한 몰락 왕족의 후예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말하자면 성왕 전사이후 크게 동요한 백제 왕권은 혜왕, 법왕을 거치며 주도권이 이미 귀족들에게 넘어갔던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제어하기 쉬운 인물을 찾아 왕으로 옹립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어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삼국유사의 무왕 대를 다룬 ‘기이’편이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인 ‘김부대왕’ 조에 이어 ⓐ남부여, 前百濟, 북부여 ⓑ무왕, ⓒ후백제, 견훤, 가락국기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가락국기는 일연이 후대의 기록을 추가한 것이지만, 일연이 ‘무왕’의 출생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부분을 굳이 ‘백제’와 ‘후백제’ 사이에 위치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무왕 조에 실려 있는 서동설화도 단순한 설화가 아닌 백제나 견훤처럼 별도의 건국신화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동설화에 나오는 무왕탄생 설화를 어떻게 살펴야 할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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