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67>498년 백제 동성왕 무진주 원정과 마한(下)

무진고성터. 침미다례 옆에 있는 소국이었던 ‘탐모라’는 백제와 관계를 통해 마한 연맹체 내에서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드러내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아래 사진) ‘삼국사기’ 동성왕 20년(498년)의 주(註) ‘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라는 기록이 있다.

12월 10일 영암문화관광해설사협회의 초청으로, ‘마한의 심장, 영암 그리고 해신 신앙의 효시, 남해신사’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였다. 2시간에 걸친 강의 내내 집중하며 마한역사를 이해하려는 30여 해설사들의 열정은 ‘마한의 심장, 영암’의 밝은 미래를 보는듯하였다. 마한역사공원을 찾는 시민들에게 마한의 역사를 설명할 때 가장 난감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무거운 책무를 느꼈다. ‘지역사’를 지키는 첨병이 바로, 이들 문화해설사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앞서 동성왕 20년, 무진주 친정 당시 공부(貢賦)를 바친 ‘탐라’가 제주를 가리킨 ‘탐라’가 아닌 별도의 ‘탐모라’를 가리킨다고 언급하였다. 필자는 양직공도에 보이는 ‘하침라’를 다룰 때, ‘침라’와 ‘침미다례’가 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침미다례 인근에 있는 소국이 아닐까라고 살핀바 있다. ‘하침라’ 위치도 강진지역으로 비정한 이홍직의 견해를 따르고 싶다고 하였다.

‘침(沈)’과 ‘탐(耽)’은 서로 통하는데, ‘탐’이 더 고어(古語)라고 한다. ‘침모라’ 이전명칭이 ‘탐모라’일 가능성이 있다. ‘하침라’와 ‘침모라’는 비슷한 음구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강진 일대로 비정한 ‘하침라’가 ‘탐모라’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백제시대에 강진지역에는 ‘도무군(道武郡)’이 있었고, 탐진현을 ‘동음현(冬音縣)’이라고 불렀다 한다. 많은 선학들도 ‘도무’와 ‘동음’이 ‘탐모라’의 ‘탐’ 또는 ‘탐모’와 유사하다 하여 ‘탐모라’를 강진일대로 비정하였다. 동성왕 20년, 무진주 친정에 놀라 조공을 하였던 나라가 강진지역에 있는 ‘하침라’인 셈이다.

그런데 이 보다 20여 년 앞선 문주왕 2년(476)에 “탐라국이 방물을 바치므로 왕이 기뻐하여 사자에게 ‘은솔’의 관을 제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의 탐라국도 당연히 강진지역에 있는 ‘탐모라’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에서 이 기사를 문주왕 때 조공을 바쳤던 강진지역 마한의 연맹체가 조공을 끊자, 백제가 반발한 것이 동성왕 20년의 무주 친정 기록이라고 두 기록을 연결지어 해석해왔다. 이를테면 문주왕 2년의 기사를 정치적 복속과 관련이 있는 ‘조공’의 의미로 살피고 있는 것이다.

476년 하침라는 백제와 교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문주왕 2년의 기사를 다시 보면, ‘방물을 바치므로 문주왕이 기뻐했다’는 내용으로,  방물을 보내왔다고 쓰여 있을 뿐, ‘조공’이라는 표현은 없다. 동성왕 20년 기사에서 ‘공부(貢賦)’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과 대비되고 있다. 이를테면 탐모라가 단순히 방물을 보내며 교역을 하였던 것을, 백제 스스로 ‘공부’의 의미를 통해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

문주왕 2년(476) 무렵의 백제는 대외적으로는 475년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하며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있었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문주왕은 귀족세력에게 재위 4년 만에 피살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혼란스런 상황에서 강진지역에 있는 마한 연맹체가 정치적 상하관계를 뜻하는 ‘조공’을 하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문주왕 2년의 기사는 문맥 그대로 ‘방물을 보냈다’는 의미 이상은 아니라 하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립무원의 문주왕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마한 연맹체의 특정 왕국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백제와 유난히 불편한 관계에 있는 해남반도의 침미다례나 영산지중해의 대국 내비리국 사이에 위치한 ‘하침라’와의 교역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적지 않았을 법하다. 문주왕이 사신에게 관직까지 하사하며 기뻐했다고 하는 것이 당시 상황을 반영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추측은 다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주지역도 618년 무렵 백제에 복속되었다

일본서기에 “계체기 2년(508, 무령왕 8년) 12월, 남해 가운데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교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무령왕 8년에 이르러 탐라와 처음 통교를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탐라’는 강진지역이 아닌 제주도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강진지역에 있는 ‘탐모라’로 해석한다면, 이미 문주왕 2년과 동성왕 20년에 백제와 직, 간접으로 관계를 맺었다고 나와 있는 삼국사기 기록과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더욱이 ‘남해 가운데 있는 탐라’라 했으므로 제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삼국사기 문무왕 2년(662) 기사에 “2월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율이 항복해왔다.

탐라국은 무덕이래로 백제에 신속(臣屬)되었으므로 좌평의 관호를 주었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항복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보면 탐라국이 백제에 복속된 시기가 무덕연간 곧 618~625년 무렵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508년에 탐라가 백제와 처음 통교했다는 기사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교류가 시작된 것임을 의미할 뿐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직 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미 508년에 탐라 즉, 제주가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498년 이전에 이미 전남 남해안 일대까지 완전히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 때는 무덕 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탐라가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하는 기사를 믿을 수 없다 하여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결국 필자처럼 이해를 해야만 무덕 연간에 탐라가 백제에게 복속되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제대로 해석된다 하겠다.

한편, 탐모라의 사신이 백제의 은솔 관위를 받은 것을 가지고 탐모라가 백제의 관위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백제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종속된 탐모라가 동성왕 때 태도를 바꾸어 조공을 하지 않았던 것은 웅진 천도이후 정치적 안정을 이룬 백제가 주변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반발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백제가 하침라에 대해 부여한 간접지배를 친정을 통해 직접지배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주왕 때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종속되었던 탐모라가 동성왕 때 오히려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어 가며 통제를 강화해가자 반발했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섬진강유역의 하동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있던 백제가 전남내륙의 마한 연맹체 깊숙이 군대를 이끌고와 백제의 영역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만약 476년에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한다면, 521년 상황을 알려주는 양직공도 백제국사에 ‘하침라’라는 국명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결국, 476년 문주왕 때 탐모라가 방물을 바친 것을 정치적 예속관계로 보는 기존의 견해는 더 이상 입론의 근거를 상실하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해석을 하여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무렵 마한 여러 나라 가운데 유독 탐모라와 백제의 관계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까닭을 당시 탐모라가 처한 상황에서 살피는 것이 어떨까 한다. 침미다례 옆에 있는 소국이었던 ‘탐모라’는 백제와 관계를 통해 마한 연맹체 내에서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드러내려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침미다례나 내비리국 등의 강대국 사이에 있는 ‘하침라’ 즉 ‘탐모라’는 백제와 교류를 하며 활로를 모색하려 한 것은 아닌가 한다.

동성왕 친정기사는 영역확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백제는 다른 한편으로 마한 연맹체를 흔들어 놓을 필요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당시 주변의 마한왕국에 비해 작은 연맹국가에 불과하였지만 백제에 우호적이었던 ‘탐모라’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탐모라’가 당시 백제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자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백제가 조심스런 행보를 하며 무진주에 이르렀을 수는 있다. 그러나 기사처럼 백제가 군사적 시위를 하자 탐모라가 놀라 조공을 바쳤다는 것은 아무래도 당시 강국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려고 하였던 백제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 백제가 처한 현실적 상황이나 6세기 중엽까지 확인되고 있는 양직공도의 여러 나라, 그리고 영산강유역의 독자적 정치체의 흔적들은 동성왕 20년의 무력사용 기사를 그냥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동성왕의 무진주 원정기사를 영역확대가 아닌 단순히 진출로를 알아보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거나 시위행위에 그쳤을 뿐 영역확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견해들은 위에서 살핀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한 점에서 498년 ‘탐모라’지역 뿐만 아니라 무진주 지역까지 백제가 복속시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521년 작성된 양직공도 백제국사에 나오는 상기문, 하침라, 마련 등이 6세기 초에 ‘막’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었거나 그다지 시간이 경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백제의 영토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국가를 상징하는 ‘방소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라고 한 논리가 얼마나 궁색스러운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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