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52>마한의 표상(表象), ‘鷹準(응준)’(下)

황룡사 9층 목탑(복원 상상도) 응준의 실체를 밝혀줄 중요한 단서가 고려후기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황룡사 9층 목탑의 건탑 설화에 있어 주목되고 있다.

지난 호에 백제가 ‘사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반면, 마한남부 연맹은 ‘매’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매를 신의 화신 또는 최초 샤만의 조상 등으로 인식되었던 시베리아 샤머니즘이 마한지역에 유포되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시사적이다. 말하자면 우리 민족의 원류에 해당하는 예맥족의 새, 사슴에 대한 신앙이 지역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부여·고구려 등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에는 사슴과 관련 언급이 빈출되고 있는데, 백제가 사슴을 희생으로 삼고 ‘부여’ 명칭이 사슴을 나타내는 퉁구스어인 ‘buyu’와 같다는 점에서 백제가 부여계통이 주류였다는 사실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반면, 신라나 마한남부 연맹 등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진한-계림·닭, 마한-매 등 새와 관계있는 언급이 빈출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매’가 마한남부 연맹을 상징하는 것임에 분명하다고 믿어진다.

황룡사 9층탑에도 응준의 실체가 있다

한편, 응준의 실체를 밝혀줄 중요한 단서가 고려 후기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황룡사 9층 목탑의 건탑 설화에 있어 주목되고 있다. 이 탑은 백제의 유명한 건축가인 아비지가 설계한 동양 최대의 목탑이었으나, 고려 후기 몽고군의 방화로 소실되어 현재 주춧돌만 남아 있다. 불보사찰로 유명한 양산 통도사를 세우고 계율종을 열었던 자장대사가 선덕여왕에게 건의를 하여 세워졌다고 하는데, 자장의 꿈에 나타난 신령이 9층탑을 세우면, 이웃 아홉 나라를 진압할 수 있다는 계시에 따른 것이라 한다.

1층 일본,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 5층 응류(鷹遊) 6층 말갈 7층 丹國 8층 여적(女狄) 9층 예맥 등 당시 동아시아 모든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선덕여왕 당시 신라에 위협을 가하던 고구려, 백제 등의 이름이 없어 의아하게 여겨지지만, 9층의 예맥이 고구려의 별칭이라고 할 때, 5층의 ‘응류’가 백제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보면 ‘응류’가 백제의 별칭이라고 하는 사실을 선덕여왕 때인 7세기 전반까지도 신라인들에게 인식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응준은 마한남부 연맹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보면, 사슴을 상징으로 하며 남부여라고 국명을 바꾼 부여 계통의 백제 왕실과 달리 ‘매’를 상징으로 하였던 세력이 당시 백제의 또 다른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하는 현실을 상상할 수 있다. 전주 우석대 조법종 교수가 ‘응류’ 곧 ‘응준’은 부여계 유이민 세력을 대변하는 명칭과는 다른 계통이라고 살핀 점은 올바른 지적이라 생각되는데, 곧, 응준을 백제가 형성되기 이전의 정치체, 즉 ‘伯濟’·‘十濟’·‘百濟’·‘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한 부여 계통성과 구분하는 의미로 살폈던 것이다.

말하자면 백제가 구체적 존재로 등장하기 이전 또는 다른 지역 세력 명칭을 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점은 마한남부 연맹을 상징하는 응준이 백제를 상징하는 남부여와 대칭되는 것으로 살핀 필자와는 견해가 다르다. 실제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탑에 남부여라는 백제를 뜻하는 국명 대신에 응준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응준’ 명칭이 후대에도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신라를 압박한 응준은, 부여계통의 백제 세력이 아니라 마한남부 연맹 계통의 백제 세력이었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기록에 보다 충실한 해석이 아닌가 한다.

전남에 ‘매’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 많아
 

전북 진안에서는 매를 이용한 꿩 사냥의 전통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예로부터 매와 전라도는 깊은 연관이 있었는데 이는 ‘매’ 곧 ‘응준’이 마한남부 연맹을 상징하는 동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신라의 별칭인 계림처럼 영산강유역에는 ‘매’와 관련된 사회, 문화적 요소들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마한남부 연맹에 해당하는 차령이남 지역에 매와 관련된 기록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해준다. 가령, 고려 충렬왕 원년 ‘응방(鷹坊)’이 처음 설치되었고, 그 중심이 나주 장흥부 관할이었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응방은 원에 ‘해동청(海東靑)’으로 유명한 ‘매’를 공물로 바치기 위해 설치된 관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바로 응방의 중심이 나주지역이라는 것이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전라도 지리산에 ‘응준’이 서식하여 매년 공물로 진상한다”고 하여, 매의 산지로서 전라도 지역을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다. 지금도 전북 진안에서 매를 이용한 꿩 사냥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매와 전라도 지역이 깊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매’ 곧 ‘응준’이 마한 남부 연맹을 상징하는 동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백제를 가리키는 ‘구다라’ 마한의 ‘응준’

한편, 일본서기에도 백제의 매를 이용한 사냥 풍습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이 백제 때의 사실이라고 일본서기에 나와 있지만, 전라도 지역이 매 주생산지라는 점과 인덕천황 43년(455년) 시기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백제가 아니라 마한과 관련된 사실을 후대에 백제의 것으로 오인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 기록에 이어 “백제의 풍속에 이 새를 구지(지금의 매를 말한다)라 하였다(百濟俗號此鳥曰俱知(是今時鷹也)”라고 한  기록이 관심을 갖게 한다. 말하자면 백제에서 매를 ‘구지’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매를 ‘구지’라 한 것은 백제가 아닌 마한과 관련된 것이라고 살피는 것이 옳다. 이처럼 ‘매’를 ‘구지’라고 불렀던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까지도 이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에서 매를 그들의 고유어로 ‘구지’ 또는 ‘구지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관심을 끈다. 일본에서 백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クダラ(구다라)’라고 하는데 ‘구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해도 크게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일본 고대문화 성립에 기여한 도래인들의 대부분이 마한계라는 점과 관련지어 보면 이해가 된다. 이렇게 살피고 보면 왜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렀을까에 대한 의문이 풀리게 된다.

이처럼 마한지역이 매를 상징으로 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백제가 5방으로 지방 편제를 할 때 전남지역에 해당하는 남방의 성 이름을 구지하성(久知下城)이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밖에 전북 김제에 해당하는 금구현을 ‘구지지산이라고 하는 등 마한남부 연맹 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에 ‘구지’ 지명이 많다는 것도 이러한 추론의 방증이다.

백제는 마한남부 연맹과 공존을 모색했다

결국, 사슴으로 상징되는 부여계인 백제 중심의 마한북부 연맹과 매로 상징되는 마한남부 연맹이 대립하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다른 인근 연맹 수장보다 훨씬 강대한 세력을 지닌 다시들 지역의 복암리 1호분 피장자가 그러한 연맹을 대변하는 세력이었다는 것을 ‘응준’ 녹유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 용맹한 인물들이 마한에 많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마한남부 연맹체를 두고 한 말이라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마한남부 연맹 세력을 백제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멸망시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마한남부 연맹세력은, 오히려 주변국과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백제와 치열하게 정립되는 구도를 오랫동안 형성하였다고 본다.

당시 고구려에 밀리던 백제의 입장에서 마한남부 연맹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본다. 그것이 복암리 1호분 세력에게 ‘응준’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녹유명문을 선물하며 상호 공존을 도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백제 국왕이 복암리 세력에게 사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백제의 힘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데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필자 소개

박해연

박해현은 1959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전남대 사범대학 국사교육과를 거쳐 동대학원에서 한국고대사를 전공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전남대학교와 동신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한국교육개발원 학교평가위원,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출제위원, 교과서 검정심의 위원 등을 역임했다. ‘신라중대정치사 연구’ ‘전남지방사 서설’(공저) ‘일본 고대 불교 발전에 기여한 백제 도래인’ ‘백촌강 전투와 한ㆍ일 역사교과서 서술’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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