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오/영암읍 장암리/전 청주대 한문교육과 교수/전 동덕여대 인문대학장/동덕여대 명예교수
내 소년시절 땔감을 구하기 위해 동네 어른들을 따라 활성산 자락이나 둔덕재를 넘곤했다. 대부분의 경우 힘에 부치고 기진하기 일쑤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를 즐겁게 했던 놀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보다 놓은 데에 올라 둥근 바윗돌을 찾아내어 아래로 굴리는 것이었다. 육중하고 모나지 않는 둥그스럼한 바윗돌을 찾아내 굴리곤 했는데, 이는 둥근 바윗돌 일수록 멀리멀리 굴러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가 난 바윗돌은 멀리 굴러가기는 고사하고 단 한 발짝도 구르지 못하고 지표면에 박히고 마는 것이었다. 둥근 바윗돌이 급한 경사면을 무섭게 굴러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노동의 피곤함도, 기진함도 한꺼번에 달아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급한 경사를 치닫는 바윗돌은 가속도가 붙으면서 굉음을 내기도 하고 제멋대로 굴러가다 장애물을 만나면 공중 높이 치솟기도 하고 간혹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산토끼를 놀라게 해 전력질주 도망치는 광경을 볼 수 있게도 해주었다. 내 이런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통쾌감과 아울러 가슴 속이 후련해지곤 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치기어린 놀이는 여간 위험천만한 것이 아니었다. 되풀이 돼서는 안 될 못된 짓이었다.
서예의 오체(五體) 중 하나인 해서(楷書)의 경우, 북위(北魏)체와 당체(唐體)는 분명한 차이점을 보인다. 북위체는 거칠고 날카롭고 예리함이 면도날 같은 면을 지닌 반면 당해는 그 예리함이 보다 무디어지면서 원만한 모양새(륵획의 마무리)를 띤다. 서체의 이런 현상은 아마도 시대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으리라. 북위해서가 모난 돌이라면 당해는 원만한 돌 같다고나 할까!
북위육조시대의 혼란과 전쟁의 소용돌이는 첨예함을 사회 전반에 가져왔을 것이고 당의 정치적 안정과 풍요로움은 원만한 해서체를 양출했으리라. 이리 보면 서체도 시대상과 사회상이 투영된다고 볼 수 있으리라.
중국 역사상 사회적·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루었던 주(周)나라 때의 석고문(石鼓文)은 원만한 필획들이 주종을 이룬다. 그래서인가 석고문을 임서하다 보면 저절로 안정감과 평온함을 받는다. 둥그스럼하게 만들어진 석고(石鼓) 표피에 새겨진 글자 글자마다 규각(圭角)을 멀리한 둥그스럼한 획들이다. 그래서 삼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유전될 수 있었다고 한다면 나의 지나친 억설일까.
내 교수시절, 후반기에 나는 학내의 큰 회오리에 휘말리어 본의 아니게 리더가 된 적이 있다. 참으로 고단하고 괴로운 시기였다. 나날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런 와중에 종로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P교수. 찻잔이 놓이기도 전에 “문교수! 둥근 돌은 멀리멀리 글러가지요. 허나 모난 돌은 조금 구르다가 땅에 박히고 만답니다.”
범박한 내용의 충고이지만 그 날 P교수의 진솔한 자세와 말씨는 종일토록 내 뇌리를 맴돌고 있었다. 둥근 돌, 둥근돌... 그래 둥근 돌은 멀리 멀리 굴러 갈 수 있겠지!
모난 것은 또 다른 모난 것을 둥글게 만든다. 이는 모난 것만이 원만한 것을 만들어 내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난 것은 모든 것에 상처를 입힌다. 심지어는 상처의 단계를 넘어 해악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세속에는 규각만이 살 길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자들이 있다. 모난 것이 먼저 정을 맞는데도 말이다.
그래서인가. 우리네 생활용품을 비롯해서 모든 용품들의 마감은 둔각으로 처리 마감되어 있다. 행여 상처를 줄까 염려해서다.
모남과 원만함. 모남이 있어 원만이 만들어지고, 원만이 있어 또 다른 모남을 만들면서 사회는 발전해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만함 쪽에 손을 들어 주련다.
왜냐면, 오늘날 세상은 자꾸 자꾸 첨예화되어 가고, 그 결과는 갈등의 극대화를 몰고 오고 비극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이 나라 구석 구석에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저 무서운 양극화. 첨예화 된 이분법 사고의 피폐상과 비극. 이를 해소시키는 데 둥근 돌이 아니고 그 무엇이 존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