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목을 뚫고 만난 용암사지… 수줍은 자태 ‘그대로’


초의선사가 오도송(悟道頌) 읊다.

   #월출산과 초의선사
▲ 용암사지 서탑
월출산은 초의가 젊은 시절에 잠시 머무르면서 수도했던 곳일 뿐만 아니라 일생일대의 큰 깨달음을 가져다준 은혜로운 곳이다. 월출산을 떼어놓고 초의선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나주 운흥사와 해남 대흥사의 중간 위치에 월출산이 있다. 초의선사가 운흥사와 대흥사를 왕래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산이었다. 이제 가장 힘든 코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의미 있고 흥미로운 답사 길을 떠난다.

아직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라서 그런 지 등산객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구슬땀을 흘리면서 산을 오른 지 세 시간 만에 천황봉과 구정봉의 갈림길인 바람재에 도착했다. 구정봉으로 가는 길목에 노오란 원추리꽃이 한창이다. 구정봉에서 용암사지 마애여래좌상까지는 서북 방향으로 내리막길을 약 500m 정도 가야한다. 주릉은 아니지만 제법 샛길이 뚜렷하게 나있다. 주변 산세를 둘러보니 기암괴석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다 엷은 안개가 깊은 골짜기에 자욱하다. 초의선사의 제자인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유가 그린 산수화에나 나옴직한 선경(仙境)이다.

한 구비 한 구비를 내려갈 때마다 전혀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가지가 우산처럼 펼쳐진 소나무들이 즐비한 숲을 통과하니 평평하고 커다란 바위 하나가 기묘한 모습으로 서 있다. 바위 위에 서서 잠시 땀을 식히면서 사방을 바라보니 영암평야 너머로 멀리 영산강이 한가롭게 흘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다시 시선을 가까운 곳으로 돌려 살펴보니 용암사지 삼층석탑과 서탑이 아스라이 수줍은 자태를 내보이고 있다. 마애여래좌상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증거이다. 이 용암사지 마애여래좌상은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총 높이가 8.5m나 되는 거불이다. 앉은 자세가 당당하고 얼굴 표정이 제법 근엄해 보이면서도 친근하다. 머리 뒤로 후광을 표현해 놓았는데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문양이다.


   #초의대종사탑비명
서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바닷길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는 불상이 아닌가 싶다. 초의선사가 월출산에 올랐을 당시 분명 이 마애여래좌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으리라. 나 역시 미리 준비해간 과일을 마애여래좌상 앞의 제단에 올리고 아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다.

월출산은 원래 바닷가에 위치한 산이었다. 영암읍에 가까이 자리 잡은 덕진포와 구림마을의 상대포는 조선시대까지도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해상통로로 이름난 포구였다. 통일신라 때는 고운 최치원 선생을 비롯한 유학생들과 스님들이 상대포를 이용하여 당나라로 떠났으며, 고려시대 때는 벽란도와 더불어 영암의 포구는 국제 무역항로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일제시대의 서호강 간척사업과 25년 전의 목포와 영암을 잇는 영산강 하구둑 공사로 말미암아 월출산 발등을 간질이던 바닷물은 저 멀리 멀어져가 버리고 개펄이 있던 그 자리에는 광활한 영암평야가 자리를 잡았다.

▲ 용암사지 마애여래좌상
초의선사가 활약하던 시대(약 200년 전)의 영암 월출산 주변 풍경은 당연히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벽해(碧海)가 상전(桑田)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나주 다도면의 운흥사에서 벽봉선사에게 가르침을 받던 초의는 19세가 되던 해에 바닷가에 위치한 호남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지는 월출산에 올랐다. 이 때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신헌이 쓴 <초의대종사탑비명>에 그 당시 스님의 행적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9세 때 월출산을 지나다가 기이하고 아름다운 산세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그 산등성이에 올라갔다. 보름달이 바다에서 솟는 것을 보고(望見滿月出海)는 마치 도인이 훈풍을 쐬면서 가슴에 막힌 것이 다 풀어지는 것처럼 황홀하였다. 이후로 만나는 것들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었으니 아미도 전생의 기가 있어 그러한 것이었던가?…”

신헌이 쓴 저 비명(碑銘)을 여러 번 읽어보았다. 읽으면서 늘 한 가지 경이로움과 또 한 가지의 의문을 동시에 느낀다. 19세 나이에 세상을 달관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대목을 읽을 때 어느 누가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혹을 넘긴 이 나이에도 앞을 제대로 못보고 안개 속을 걷는 듯 세상살이가 답답한데 저 약관의 청년이 얻은 깨달음의 정도를 헤아려볼 때 한편으로는 경이롭고 또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월출산에서 뜨는 달이 가장 잘 보이는 마을에서 태어나 여태껏 살면서 어찌 이렇게 세상의 이치를 깨치는 일에 이리 더딜까? 월출산 달을 수 십 년 동안 보고 살았으니 이제 한 소식 깨칠 때도 되었는데….


   #용암사와 동석사
▲ 용암사지 삼층석탑

한편 신헌이 쓴 비명(碑銘) 중 망견만월출해(望見滿月出海)라는 대목이 있다. “보름달(滿月)이 바다에서 솟는 것을 보다”라고 했는데, 월출산이 위치한 지리적 측면을 고려해볼 때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잘 알다시피 보름달은 항상 저녁 6시 무렵에 동쪽에서 뜬다. 그런데 월출산 동쪽에는 바다가 없다. 월출산 주릉에 위치한 천황봉과 구정봉에서도 그렇고 지릉의 한 갈래인 용암사지 마애여래좌상 앞에서도 그렇고 바다는 서쪽으로 내려다보인다. 따라서 월출산 능선에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름달이 동쪽에서 떠서 월출산 천황봉과 구정봉을 넘어 서해바다에 비치는 시각이 되려면 한밤중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초의선사가 월출산 봉우리에서 바라본 보름달은 바다에서 떠오른 달이 아니라 서해바다에 비친 달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초의선사는 늦은 시간까지 월출산 등성이에서 달구경을 하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밤 시간에 산봉우리에 머물면서 달구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에 월출산 주릉 가까운 곳에 크고 작은 암자가 여러 개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조들의 시(詩)나 기행문을 보면 실제로 구정봉 아래에 있던 여러 개의 암자 이름이 나온다. 지금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암자 터는 용암사와 동석사이다. 동석사지는 영암이라는 이름이 있게 만든 동석(動石·흔들바위)이 있는 곳에 있다. 고려 명종 때의 학자 김극기는 동석사를 방문하고 나서 시를 한 수 남겼다.


             동석사(動石寺)
                               김 극 기

월출산 서쪽 고개마루에, 이상한 한 덩어리 바위가 있네
지나는 길손 모두 길을 굽히고, 대개 올라서 구름 자취를 찾는다
내가 만약 그대로 지난다면, 땅의 신령이 응당 책망하리라.
산 아래에 와서 말을 멈추니, 나뭇가지에 나는 신이 멈추도다.
과연 천 길이나 되는 바위를 만나니, 높고 우뚝한 것 빈 하늘을 의지했구나
손을 따라 바야흐로 흔들어 떨치니, 응당 먼지를 끌어 붙이는 호박(琥珀) 같구나
이름만 듣고 오래토록 의심만 품다가, 한번 보자 얼음이 풀리듯 알겠도다
흥이 다하여 깨끗한 방을 찾아 방석 깔고 텅 비고 훤한데 앉으니
잠간 사이에 감로반(甘露飯) 한사발이 부엌에서 왔도다
그대로 도연명의 술잔을 잡고, 해가 서산에 기울어감을 알지 못했더니
달빛이 사람을 비쳐 와서 맑은 경치 더욱 아깝구나
고요한 가운데 누가 반려(伴侶)가 될까, 소나무 돌까지 세 익우(益友)가 되네.


조선시대의 고경명과 같은 많은 시인묵객들도 이 전설적인 동석과 주변 암자를 방문하여 글을 남겼다. 하지만 암자가 폐허가 된 후 지금은 찾는 이들의 발길이 뜸해 가는 길이 초목에 묻혀있다. 반면에 용암사 터는 찾아가기가 쉽다. 마애여래좌상에서 조릿대가 무성하게 우거진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용암사지가 나온다. 너른 터는 아니지만 규모가 아담하고 짜임새가 있어 보인다. 무너진 축대와 주춧돌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 보기 안타깝다.


   #용암사의 옛 영광이…
암자 터 동쪽 큰 바위 아래 작은 샘이 하나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위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다. 용암사 스님들은 당시에 이 물로 밥을 짓고 차를 달였으리라. 김극기도 이 감로수로 지은 밥을 한 사발 얻어먹고 감로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거라는 짐작이 든다. 샘 오른편으로 돌계단이 나 있다. 이 돌계단을 오르면 이윽고 삼층석탑이 나온다. 발굴 과정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32과나 출토되어 지금 도갑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탑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형태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든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월출산 경포대 입구에 있는 월남사 모전석탑의 양식과 흡사하다. 다만 크기만 다를 뿐이지 형태와 질감이 많이 닮아있는 것으로 보아 조성 연대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잠시 탑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천황봉, 구정봉, 향로봉, 비로봉, 서석봉, 깃대봉, 노적봉을 배경으로 하고 탁 트인 서해 바다를 정면으로 굽어보는 자리에 위치한 용암사의 옛 영광을 눈을 감고 떠올려 보았다. 옛 선사들은 이곳에서 불경을 읽고 참선을 하고 향기로운 작설차도 마셨으리라. 풍류를 아는 선비들이 찾아오면 산나물 몇 가지로 차린 정갈한 밥상을 대접했으리. 영산강 주룡강 굽이쳐 흐르는 서해바다로 해가 기울고 달이 기우는 밤이 오면 차 한 잔, 곡차 한 잔 서로 나누며 새벽이 올 때 까지 담소를 나누었겠지. 19세 약관의 청년 초의도 월출산의 신령스런 기운에 이끌려 달빛을 등불 삼아 이 용암사 까지 내려왔으리라. 한 밤 중에 적요(寂寥)한 암자에 찾아든 젊은 객승, 초의. 달 뜨는 산에 와서 바다에 비치는 달빛을 보고 문득 홀연히 깨달아 대자유인이 된 이 젊은 스님을 용암사의 스님들은 어떻게 맞이했을까? 글 / 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 모정마을 12편은 삼효자와 관련된 고문서(한문) 번역이 늦어진 관계로 다음 주로 미루었습니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대신에 한국의 다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초의선사의 발자취를 따라간 월출산 산행기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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