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서호정 마을의 가을 정취에 취하다
월출산 벚꽃 백 리 길[203] ■ 구림마을(113)
늦가을 정취가 가득한 서호정 마을
11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영암 산하에 가을이 깊게 물들어 가고 있다. 밭둑에는 하얀 억새꽃이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마을 뒷동산마다 울긋불긋 단풍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도기박물관이 있는 서호정 마을은 가을 정취가 단연 돋보이는 마을이다. 골목길마다 흙 돌담 너머로 낭창하게 휘어진 빨간 감나무 가지나 도기박물관 입구에 우람하게 서 있는 노오란 은행나무나 죽림정 초입에 일주문처럼 서 있는 두 그루 팽나무나 간죽정과 죽정서원 주변의 형형색색의 단풍나무나 날씨가 추워질수록 더욱 늠름하게 나이 들어가는 회사정 소나무 때문만은 아니다. 도기박물관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2025년 특별전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호정 마을의 가을은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더해지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다. 영암 군민이라면, 이 가을이 다하기 전에 서구림 서호정 마을에 가서 꼭 ‘도기박물관 특별전’을 관람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나 이 뜻깊은 특별전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나라 도자(陶磁)의 역사와 차(茶)에 대한 기본 상식을 갖추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조선 후기 정조 때의 문장가이자 서화가인 저암(著菴)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은 당대 서화 수장가였던 김광국(金光國)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발문(跋文)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보게 되며, 볼 줄 알게 되면 소장하게 되니, 이것은 한갓 모으는 것과는 다르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이것은 현대에 와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 지역의 보물 도기박물관 전시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 도자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도자기의 변천사
소성 온도(굽는 온도)와 유약 사용 여부에 따라 토기(土器 )- 도기(陶器, 유약 사용 시작) - 자기(磁器)의 순서로 발전했다. 즉, 빗살무늬토기(신석기) - 민무늬토기(청동기) - 경질토기·시유도기(삼국/통일신라) - 청자(고려) - 분청사기·백자(조선)로 이어져 온 것이다.
선사시대 토기(土器, Earthenware)는 유약을 사용하지 않고 낮은 온도(약 700도 미만)에서 구워 물이 스며드는 특징이 있다. 신석기시대(약 8,000년 전부터)의 대표적인 토기인 ‘빗살무늬토기(櫛目文土器)’는 표면에 빗살 모양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바닥이 뾰족하거나 둥근 형태가 많다.
청동기시대(약 3,000년 전부터)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는 표면에 무늬가 없고, 바닥이 편평해져 저장 용기로서의 실용성이 높아졌다.
삼국시대 이후 토기는 도기(陶器, Stoneware)로 전환된다. 삼국시대부터 토기는 더욱 높은 온도에서 구워 단단한 도질토기로 발전했으며, 유약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현대적인 의미의 도기가 등장한다. 경질토기(硬質土器)·도질토기(陶質土器)는 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 단단하고 흡수성이 낮아졌다. 회색 또는 회흑색을 띠며, 유약을 바르지 않았지만 토기가 구워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약과 비슷한 막이 생기기도 했다.
통일신라 시대(8세기경)로 오면서 시유도기(施釉陶器)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암 구림도기가 대표적인 예로 유약(재유 등)을 의도적으로 발라 1,200도 내외의 고온에서 구운 것이다. 이는 이후 고려청자로 이어지는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고려와 조선시대는 자기(磁器, Porcelain)의 전성기였다. 고령토 등 순도 높은 흙을 사용하여 1,250도 이상의 최고온에서 구워 투광성이 있고 매우 단단하며 흡수성이 거의 없는 자기가 완성되었다. 청자와 백자는 모두 자기의 범주에 속하며, 고온에서 구워내어 단단하고 비투수성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 둘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태토(그릇의 몸체)의 성분과 유약의 성분 및 색상이다.
비색(翡色)의 고려 청자
고려시대(10~14세기) 청자는 유약 속 철분이 구리처럼 산화되지 않고 환원되면서 푸른빛 또는 맑은 녹색을 띠게 된다. 이 비색(翡色)은 고려청자의 가장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특징으로 꼽힌다. 태토 색상은 회백색 또는 회청색이고, 철분(Fe)을 소량 함유한 유약을 사용했다. 환원염(還元焰, 산소가 적은 상태)으로 구울 때, 유약 속의 철분 성분이 아름다운 비색(翡色)으로 발색된다. 고려청자의 상감(象嵌) 기법은 그릇 표면에 무늬를 파내고 그 안에 백토나 자토를 메워 넣어 장식하는 기법을 말한다. 구름, 학, 버드나무, 모란 당초문 등의 다양한 종류의 문양을 넣어 만들었다.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
조선 초기(15~16세기)에 유행한 분청사기(粉靑沙器)는 청자 태토 위에 백토를 분장하여 자유롭고 활달한 미감을 표현했다. 고려 말기, 청자의 제작 기술이 쇠퇴하면서 그 대안으로 등장했다. 태토(몸체 흙)의 질이 청자보다 떨어지더라도 백토(하얀 흙)를 덧발라 청자 유약을 씌움으로써 청자보다 밝고 깨끗한 효과를 내고자 했다.
조선 왕조 건국 직후인 15세기 전반부터 중앙 관요와 지방 요지에서 대량 생산되었으며 일반 서민층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16세기 중엽 이후, 조선 왕실과 사대부의 취향이 순수한 백자로 완전히 옮겨가고 임진왜란(1592년)을 겪으며 생산 기술이 단절되면서 쇠퇴했다.
'분청사기'는 분(粉)을 청자 태토 위에 바른 사기(沙器)라는 뜻으로 1930년대 미술사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청자와 같은 회청색(灰靑色) 태토 위에 백토(하얀 분)를 씌운 다음, 엷은 담록색 또는 회청색의 청자 유약을 발라 굽는다.
왕실의 통제를 많이 받았던 청자나 백자와 달리 지방 가마에서 자유롭게 제작되었기 때문에 형태와 무늬가 소박하고 활달하며 개성적이다. 특히 후기 분청사기는 백토를 바르는 방식이 흡사 그림을 그리는 듯한 회화적 필치와 무늬를 보여준다.
분청사기의 다양한 분장(粉粧) 기법
분청사기는 백토를 입히는 방법에 따라 수많은 독창적인 장식 기법으로 분류된다. △인화(印花)분청- 도장처럼 생긴 기구로 작은 국화 무늬 등을 찍은 후 백토를 메우는 기법. △조화(彫花)분청- 백토를 바른 후, 선으로 문양을 긁어내 태토가 보이게 하는 기법. △박지(剝地)분청- 백토를 바른 후, 무늬 이외의 바탕 부분을 긁어내 태토가 드러나게 하는 기법. 무늬가 흰색으로 돋보인다. △철화(鐵畫)분청- 백토를 바른 위에 철분이 많은 안료로 자유롭고 활달하게 그림을 그리는 기법. △귀얄분청- 붓(귀얄)으로 백토를 쓸어 바르는 기법. 붓자국이 그대로 남아 활달하고 소박한 미감이 두드러진다.
조선 시대의 백자
조선시대 전 기간(15~19세기)에 걸쳐 유행한 백자(白磁)는 순백색의 깨끗한 미감이 특징이며, 조선 왕조의 중심 도자기로 발전했다.
태토 색상 순백색 (철분 함량이 매우 낮음) 철분 함량이 극히 적은 무색의 유약을 사용했다. 산화염(酸化焰, 산소가 충분한 상태) 또는 약한 환원염으로 구울 때, 태토와 유약의 순도 덕분에 순수한 백색으로 발색된다. 백자의 특징적인 기법으로 철화(鐵畫)와 청화(靑畫)가 있다. 철화는 철 성분의 안료로 무늬를 그려 넣는 기법이고 청화(靑畫)는 코발트 성분의 안료(顔料)로 푸른 무늬를 그려 넣는 기법이다. 백자는 깨끗한 백색을 통해 절제미와 순수미를 표현하며, 조선 유교 사회의 검소하고 단아한 미의식을 잘 나타내 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