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실험의 섬’에서 ‘희망의 섬’으로
풍력 사라지고… 디젤발전기만 남았다 정부 220억 투입… RE100 마을 조성 재도약
‘친환경 명품 섬’의 꿈과 좌절
서귀포시 모슬포항에서 남쪽으로 5.5㎞ 떨어진 가파도는 고구마·보리 농사와 해녀 어업으로 살아온 작은 섬이다. 2011년 정부가 추진한 ‘탄소 없는 섬(Carbon Free Island)’ 시범지로 선정되면서 전국적 관심을 받았고, 2012년 풍력발전기 2기와 태양광 설비가 설치됐다.
당시 정부는 가파도의 재생에너지 비중이 30%를 넘는다며 “탄소중립 모범사례”로 소개했지만, 풍력발전기는 불과 5년 만에 멈췄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현재 섬에서 가동되는 재생에너지는 하루 최대 156㎾h의 태양광 전력이 전부로, 하루 소비량 5천333㎾h의 2.9%에 불과하다. 주민들은 “설치할 때는 요란했지만 관리와 교체는 뒷전”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관광 섬의 역설
가파도는 청보리밭과 바다 풍광으로 사랑받는 관광지다. 드라마 〈킹더랜드〉, 〈웰컴투 삼달리〉, 〈우리들의 블루스〉, 예능 〈마을애가게〉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루 평균 300~500명, 청보리 축제 철에는 1천명 이상이 찾으며 ‘작은 섬의 큰 인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관광산업의 성장은 생활 인프라 불편을 가리지 못했다. 카페·매점·숙박업소 등은 건축물 용도 문제로 태양광 패널을 설치할 수 없어 전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숙박업소 주인은 “특수지역인 만큼 일정 규모 이하 태양광은 허용해야 한다”며 “관광객이 늘어나는 만큼 주민 생활 여건도 함께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때 1천200명이 넘게 살던 섬은 지금 120여 명만 남았고, 가파초등학교 전교생은 단 한 명뿐이다. 주민들은 “살기 힘든 섬이 되니 사람이 떠날 수밖에 없다”며 정주 여건 개선을 요구한다.
정책의 단절과 주민들의 불만
주민들의 불만은 단순히 발전 설비의 노후화에만 있지 않다. 풍력발전기를 세울 때는 설명회를 열며 설득하던 정부와 지자체가 막상 관리와 사후 대책에는 손을 놓았다는 점이다.
한 주민은 “태풍에 패널이 날아가도 고쳐주는 곳이 없다”며 “10년 지나면 교체해 준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말뿐이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주민은 “관광객은 매년 늘어나는데 정작 주민들은 여전히 디젤 발전기 소음 속에서 살아간다”며 “정책이 보여주기식으로 끝나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두 번째 기회, RE100 마을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에 ‘가파도 RE100(Net-Zero Island) 마을 조성사업’ 220억 원을 반영했다. 디젤 의존에서 벗어나 100% 재생에너지 섬으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다.
제주도는 이번 국무회의를 통해 확정된 2026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총 2조3천10억 원의 국비를 확보했다. 이는 지난해보다 3천296억 원이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로, 가파도 RE100 사업은 그 가운데서도 탄소중립 정책을 선도할 핵심 사업으로 꼽힌다.
제주도 관계자는 “가파도 RE100 사업은 단순한 홍보용 프로젝트가 아니라, 주민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고 관광산업과 연계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실험의 섬’을 넘어 ‘희망의 섬’으로
13년 전, 가파도는 ‘친환경 명품 섬’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정책의 단절과 관리 부재 속에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이번 RE100 마을 조성사업은 단순한 구호가 아닌, 실질적 변화의 기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주민들은 “관광객에게만 보여주는 섬이 아니라, 사람이 편히 살 수 있는 섬이 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전문가들은 “이번에는 지속가능성을 담보해야 한다”며 주민 참여형 모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풍력은 사라지고 태양광은 노후화됐지만, 정부와 제주도의 지원 속에서 가파도는 다시 한번 ‘대한민국 에너지 전환의 랜드마크’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한때는 실패한 실험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주민과 관광객이 공존하며 미래 세대가 이어갈 수 있는 진정한 ‘희망의 섬’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전국의 이목이 가파도로 모이고 있다.
가파도의 사례는 보여주기식 정책으로는 결코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정책의 연속성, 주민 참여, 그리고 철저한 사후관리가 함께할 때, 가파도는 비로소 실험의 섬이 아닌 진정한 희망의 섬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