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은선생실기(湖隱先生實記)에 나타난 최동식 선생의 업적

월출산 벚꽃 백 리 길[190] ■ 구림마을(100)

2025-08-08     김창오

필자가 2022년 6월 월암마을을 답사하던 도중에 300년 된 함양 박씨 입향조 고택을 지키고 있는 박석구 씨로부터 ‘湖隱先生實記’라는 제목의 고문서를 받아본 적이 있다. 필자는 이 한문으로 된 고문서를 영암문화원에 전송하였고, 영암문화원에서는 ‘영암의 누정’(호은정 편)에 국역하여 실었다. 이 문서로 말미암아 낭주인 호은 최동식 선생의 업적을 엿볼 수 있었다. 

호은선생실기(湖隱先生實記)
늘 백부·숙부와 이웃하여 부친처럼 이들을 섬겼다. 옷과 음식을 줄이고 조금씩 공력을 쌓아가니 집안의 도가 점차 온화해졌다. 땅을 구획하여 종친들을 부유하게 하고 밭을 두어 조상의 제사를 지냈다. 구림의 종족이 가난하고 부족하여 예를 지킬 수 없었다. 종족들과 계를 만들고 의전택(義田宅)을 두었다. 또 마을에 사는 사람이 빈곤하고 풍속과 교화가 쇠퇴하자 마을의 사람들과 첩(帖)을 만들고 수계엄조약(樹稧嚴條約)을 수립했는데, 이는 대체로 석담(石潭)의 전범이 되는 가르침의 예를 본뜬 것이었다. 또 노인회를 두어 연로한 어르신들이 여생을 즐길 수 있게 했는데 이는 속수(涑水) 선생의 기영회(耆英會)의 예를 본뜬 것이었다. 그가 효성과 우애를 추종함이 이렇게 넓었다. 문장은 한가할 때 하는 일이었다. 

구림에는 ‘대동계’라고 불리는 계가 있었는데 선대에 만든 것으로 전답도 있고 누정도 있었다. 세상이 바뀌고 풍속도 바뀌면서 학교에 넘어가서 그 소유가 되었다. 선대의 법도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볼 수 없게 되자, 선생은 감개하고 슬퍼하여 몸과 마음을 다해 그 원래 모습을 되찾게 하였다.

영암의 향교도 재앙으로 망가지자, 선생은 다방면으로 손을 써서 향교를 중건했다. 또 이미 잃어버렸던 학전(學田)을 되찾아와 석채(釋菜)의 예에 제공했다. 유림들과 모성계(慕聖契)를 만들어 간절하게 흠모하는 마음을 기탁했다. 선생이 성현을 높이고 흠모하는 정성이 이와 같았다. 뿐만 아니라 학당을 두어 인재들을 길렀으니, 세상에 공로가 있음이 또한 이와 같았다.
<출처: 영암의 누정, 396쪽, 영암문화원>

고문서를 읽을 때 한자 자체도 어렵지만 특정한 문구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호은정실기’ 역시 마찬가지다. 이 기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문구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수계엄조약(樹稧嚴條約)
‘수계엄조약’은 나무를 지키기 위해 모인 공동체(수계)가 정한 엄격한 규약(엄조약)이라는 뜻이다. ‘수계’(樹稧)라는 용어는 문중뿐만 아니라 마을 단위의 공동체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마을 사람 전체가 모인 동계(洞契) 또는 유사한 마을 조직으로 마을의 당산나무와 숲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마을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당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신성한 나무다. 마을 숲은 마을의 경관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물론,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防風林)이나 홍수를 막아주는 방재림(防災林)의 역할을 했다. 또한 생활에 필요한 땔감이나 약재를 얻는 공동의 자원이었다.

‘엄조약’이라는 이름처럼, 수계의 규약에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처벌 조항들이 포함되었다. 첫째. 나무를 훼손할 경우는 벌금(과태료)을 부과하거나, 공동체 내의 공적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질책을 받았다. 둘째. 반복적으로 위반할 경우는 계(契)에서 제명되거나, 심한 경우 문중에서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이는 사회적 관계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매우 두려운 처벌이었다. 셋째. 공동체의 감시와 협력을 통해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감시하고 협력하여 규약을 지키게 했다. 규약 위반자를 발견하면 즉시 고발하여 처리했다.
  
석담(石潭)의 전범이 되는 가르침
‘석담(石潭)의 전범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문구는 고려 말의 뛰어난 문신이자 학자였던 석담 이인복(石潭 李仁福, 1308~1374)의 삶과 학문적 업적이 후대에 모범이 된다는 뜻이다. 석담 이인복은 고려 말의 혼란기 속에서 절개와 청렴을 지켰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고려 시대의 성리학을 발전시킨 인물 중 한 명으로,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등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석학으로 존경받았다. 특히 그의 셋째 동생인 이인임(李仁任)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형제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원칙을 지키며 부정부패를 비판할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여기서 ‘전범’(典範)은 단순히 따라야 할 모델을 넘어, ‘변하지 않는 진리가 담긴 모범’을 의미한다. 즉, 석담 이인복의 가르침은 개인의 사사로운 견해가 아니라,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모든 이가 본받아야 할 보편적인 가치와 윤리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인복의 가르침이 전범이 되는 이유
첫째. 학문과 덕행의 일치다. 이인복은 단순히 경서를 읽고 시를 짓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경전의 내용을 자신의 삶에 그대로 실천하려 노력했다. 당시 고려 사회는 권문세족의 전횡과 불교의 폐해로 혼란스러웠지만, 이인복은 흔들리지 않고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정도(正道)를 걸었다. 그의 삶 자체가 학문적 가르침의 살아있는 증거였기에, 후대 학자들은 그의 행적을 통해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을 깨달을 수 있었다. 둘째. 강직한 절의(節義) 정신이다. 이인복이 활동했던 시기는 고려 왕조가 쇠퇴하고 신흥사대부가 등장하는 격변기였다. 하지만 그는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았다. 특히 동생인 이인임이 권력을 잡자, 오히려 동생의 전횡을 비판하고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사적인 감정이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공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선비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훗날 조선 시대 유학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셋째. 문장(文章)을 통한 교화이다. 이인복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시문(詩文)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성리학적 이념과 세상의 이치를 담아내는 도구였다. ‘목은집’(牧隱集)을 비롯한 여러 문집에 실린 그의 글들은 후대 학자들이 올바른 길을 찾고 덕을 닦는 데 중요한 교재가 되었다. 그의 문장은 도(道)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단순히 문학적 가치를 넘어 교화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석담의 전범이 되는 가르침’은 석담 이인복의 삶과 행동, 그리고 그의 문장 속에 담긴 확고한 윤리적 가치와 절의가 후대 사람들에게 따라야 할 궁극적인 모범이 된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속수(涑水) 선생의 기영회(耆英會)의 예 
중국 북송 시대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사마광(司馬光)과 그가 주도했던 노년의 모임을 가리킨다. 이 문구는 단순히 모임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덕망 있는 원로들이 어떻게 노년을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제시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속수(涑水)는 중국 북송 시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호(號)이다. 그는 산서성(山西省) 속수향(涑水鄕) 출신이었기에 속수 선생이라 불렸으며, 거대한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한 인물로 유명하다. 기영회(耆英會)는 ‘늙고 덕망 있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耆(기)는 70세 이상의 노인을, 英(영)은 뛰어난 인물을 의미한다.

특히 사마광이 주도했던 기영회는 단순히 연장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당시 신법(新法)을 둘러싼 정쟁에서 물러난 원로 학자들이 모여 서로의 학문을 논하고 우의를 다지던 친목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는 사마광 외에도 부필(富弼), 문언박(文彦博)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참여했다.

‘속수 선생의 기영회 예’는 사마광과 그의 동료들이 정치적 권력을 초월하여 오로지 학문과 덕행, 그리고 우정을 나누며 노년을 보낸 삶의 태도가 후대에 귀감이 된다는 뜻이다. 당시 대다수의 원로들은 권력을 놓지 못하거나 후대를 질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사마광과 그의 기영회는 달랐다. 그들은 낙양(洛陽)에 은거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시를 짓고 음악을 즐기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이는 권력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삶의 도리를 다하는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속수 선생의 기영회 예’는 덕망 있는 원로들이 서로의 지혜를 존중하고,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순수하게 교류하며 품위 있는 노년을 보낸 모범적인 사례를 뜻하며, 후대의 학자나 관료들에게 귀감이 되는 가르침으로 여겨진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