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여정

2025-07-25     전동호
전 동 호          ​​서호면 엄길生 도로 및 공항기술사​​​​​​ 공학박사​ ​​​​​​전라남도 건설교통 국장 역임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렸다. 양동이로 퍼붓듯이, 200년 만에 한 번 올까 말까, 억수같이 내린 장대비였다. 끝났다던 장맛비가 폭우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푹푹 찌고 있다. 칠월 초입에도 그랬다. 어디로든 바람을 찾아가자고 했다. 목포역에서 우수영, 울돌목 넘어 병풍도, 이튿날 아침 8시 진도항에서 추자도, 셋째 날 오후 5시 반 그 산타모니카호로 돌아오는 청림칠우의 이박삼일이 시작됐다.

진도자연휴양림 병풍도. 첫날 점심은 흑산동인수산 전복으로. 회, 구이, 죽 그리고 젓갈까지 언제나 최고다. 법정 스님 고향에서 무소유를 배우고, 구 등대에서 커피 한 잔, 5대 문인화 산실 운림산방을 지나, 여귀산미술관 시화박물관에서 ‘스쳐가는 인연도 함부로 버리지 말자’한 시 서화상을 만났다. 소리 없던 폐교에 새바람을 넣은 낙향 노부부가 잊히지 않는다.

앞바다 병풍도는 노출암 단애이다 보니, 사람은 살 수가 없다. 1816년 9월 영국 바실 홀(1788~1844) 대령이 상조도 도리산에 올라 ‘세상의 극치’라 했던 다도해해상국립공원 150여 새때 군도의 하나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304 원혼이 담긴 맹골수도이기도 하다. 팽목에서 20여㎞ 찻길이면 언제든 갈 수 있지만, 아직은 바다 위로 그은 선뿐이다. 언젠가 이루어야 할 우리들의 바람이다.

추자도(楸子島)는 남도? 추자도는 가래나무 열매가 뿌려지듯이, 40여 섬으로 이루어졌다. 고려 때는 돛 바람을 기다리던 후풍도라 불렀다. 오랫동안 남쪽 백 리, 둘레 27리인 영암 땅이었다. 1760년 여지도서, 1789년 호구총수, 1832년 대동지지의 기록이다. 1881년 제주목에서 1891년 다시 영암, 1896년 신설 완도군, 1914년 13도로 개편되며 사수도(장수도) 등과 함께 제주가 되었다지만, 남도 사투리만은 여전하다.

진도 출항 45분 만에 도착한 상추자항은 땡볕이다. ‘추자에 가면’에서 아침 후, 1374년 ‘목호(牧胡)의 난’ 평정 최영 장군 사당을 지나, 봉굴레산과 다무래비를 가른 나바론 절벽에서 구불구불 등대 전망대로 내려와, 젖은 몸으로 몽돌의 가락과 오동여 물회 맛을 즐겼다.

하추자로 간다. 212m 추자대교를 2시 버스가 아닌 두 발로 건너고 있다. 뙤약볕 아래서 오지박길, 두 봉을 넘어야 한다. 막걸리 몇 잔에 ‘헉헉 후’가 되었어도 엉겅퀴, 찔레꽃과 샘터를 만나며 묵리슈퍼에 도착했다. 조금만 더, 신하리 동쪽 삼거리에서 예초리로 간다. 풀도 예의 바른 돈대산 초입에 에코하우스가 저기, 석양 노을이 좋다.

추자도는 서울에서 제주 고속열차가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간역이다. 목포, 영암, 완도, 추자, 제주까지 178㎞(해저 89)에 약 20조 원이 들어간다. 그렇지만 2007년 이후 제자리걸음이다. 20여 년 일자리와 세계 최장 해저터널 기술이 장차 대륙연결 미래산업 참여에도 도움을 줄 텐데, 오직 생각이 제2제주 공항뿐이다.

동녘 물생이 끝에서 만남과 믿음 새벽바람이 시원하다. 1801년 겨울, 두 살 황경한이 내려진 곳이다. ‘아버지 하느님 고맙습니다. 바람이 지나는 것 같이 더는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것처럼 우리의 길을 의심치 않게 하소서. 명련과 경한 모자의 기적처럼 우리의 눈물을 씻겨 주시고, 그 어떤 고난도 지날 수 있게, 만복이 깃들게 하소서’

동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해야 떠라 빨갛게 해야 솟아라’ 큰 기쁨을 뒤로, 돌아가는 계단은 ‘눈물의 십자가’를 짊어진 골고다 언덕, 바윗골의 빗물은 성수가 된다. 동행과 반려의 길을 따라 청등방기나무, 파리풀, 예덕나무가 빼곡하다. 추석산 자락 ‘눈물의 샘’과 황경한 무덤 위로 익투스, 인리, 피에타상이 함께한다.

황경한(1800~ ?), 누구인가? 천주교 신유박해, 1801년(순조 1) ‘황사영백서사건’의 황사영(1775~1801)과 정명련(난주, 1773~1838)의 외아들이다. 명련이 제주 귀양 뱃길에서 추자도에 내려놨다. 거열형을 당한 아버지와 관노가 된 어머니의 자식이 아닌,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오씨 노인이 거두어 어부가 되었고, 아들 둘을 낳아 황씨와 오씨 성을 갖게 했으니, 지금도 후손들끼리는 혼인하지 않는 연유가 되었다.

명련 마리아는 제주 대정, 사영 알렉시오는 양주 가마골에 묻혔다. 그에게 조선과 왕조는 하나였을까? 아니었다. 왕조는 주인이 아니라, 백성과 믿음을 탄압하고 죽이는 사탄이었다. 바꿔야 했다. 그렇게 ‘청의 한 성, 서양의 배 수백’ 등 표현이 되었지만, 나라까지 넘기잔 뜻은 아니었다. 모두를 구하고 싶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역모가 됐다. 멸문지화, 죽음으로 지킨 믿음을 다해야 했다.

사랑과 인연을 더하다. 천주교 박해는 1791년 진산사건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이가환 정약용을 주문모 신부와 연결한 1795년 을묘박해와 1801년 신유박해, 강원과 경상도 1815년 을해박해, 정하상 남매 순교 1839년 기해박해, 김대건 순교 1846년 병오박해, 절두산과 해미에서 8천이 잘린 1866년 병인박해가 7년이나 계속됐다. 로마 가톨릭은 1984년 103위 시성, 2014년 123위 시복 그리고 또 황사영 등 133위의 시복을 추진 중이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하늘을 우러르며 받은 영생의 사유(思惟), 그 반대로 얻은 약전의 자산과 약용의 18년 초당을 되돌아보게 한다. 나는 어땠을까? 이랬다저랬다 말자며, 크낭산으로 간다. 탁 트인 바람과 뜰을 지나니 신양리, 창원황씨 세거지였다. 거기 추자북경에서 짜장면, 다시 순환버스로 상추자 포세이돈당구장까지, 사랑과 인연을 더한 여정(旅情)이었다. 다음은 조도(鳥島) 돈대산(墩臺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