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잊혀짐에서 온다
6월은 풍성한 계절이다. 밀·보리를 수확하는 달이고 살구와 매실이 익어가는 계절이다.
나에게는 이달에 큰아들이 태어난 달이자, 어머니가 돌아가신 달이어서 더욱 특별하다. 올해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5년째 되는 달이다.
밤새 비가 내렸고 아침에는 앵두가 익고 금은화가 활짝 피었다.
무대는 그대로인데 당신들이 거닐던 마당과 툇마루는 그대로인데 배우들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쉬러 간 것이 아니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다시는 저 봄꽃 흐드러진 정원에서 저 탁 트인 누마루 탁자에서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줄기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던 당신들의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배우들이 저 무대를 거쳐 갔을까?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또 형제자매들...그동안 켜켜이 쌓아 올린 업적과 추억들과 그리움을 뒤로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길 떠난 님들에게 생전에 더 살갑게 다가가지 못했던 죄스러움과 동시대를 잠시라도 함께 동행했던 것에 대한 고마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우리도 언젠가는 커텐을 내리고 찬란하게 빛나던 저 무대에서 내려올 것이다. 그때도 세상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비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새들로 하여금 노래 부르게 할 것이다.
그 무대는 다른 주연·조연 배우들로 채워질테고, 그들은 또 자신이 맡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낼 것이다. 그러니 여기 있을 때 잘할 일이다. 다만, 무대 위에서 내가 맡을 역할은 스스로 정해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써준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은 꼭두각시나 하는 일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의 주인이 될 수도, 누군가의 종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는 스스로를 종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한 번 주어진 무대에서 스스로 종이 되어 살 필요가 있을까 자문해본다.
나는 나고, 좀 더 확장하면 '더 큰 너의 또 다른 이름'이 나다. 무대에서 활동하고 사라졌던 사람들도 '나'였고, 지금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나'이고, 앞으로 저 무대에 등장할 사람들도 '나'라고 명명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무대에 올랐던 나도, 너도, 그도, 그녀도, 모두 '나'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서 '사라지는 나'는 없다. 그 이어짐과 연속성 속에서 나는 영원히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내가 언젠가 저 무대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아쉬울 것도 서러울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우리가 먼저 떠난 사람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 이별은 없다. 이별은 사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생 이별이 존재하는가. 이별은 잊혀짐에서 온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으로 슬퍼할 일은 누군가의 마음과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것이다.
나는 먼저 무대를 떠난 선조들과 부모님들과 형제자매들과 친구들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 이별이란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면서 실존하는 삶을 사는 한 그들 역시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