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봉우리에 해는 아직 오르지 않았는데 이른 아침의 안개 푸르스름하게 피어오르네”
월출산 벚꽃 백 리 길[181] ■ 구림마을(90)
회사정을 중건한 조행립
분서(汾西) 박미(朴瀰 1592~1645)가 쓴 회사정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내가 남쪽에서 떠난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조백원(조행립의 자) 형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내가 고을의 수령을 그만둔 뒤로 이 마을에서 살면서 자취를 어루만지며 감회가 일어날 때마다 개연한 마을을 금할 수 없었으므로 마을 사람들과 같이 다시 회사정을 건립하였는데 과거의 사람들이 건립한 것보다 더 화려하게 지어 후세의 사람들이 보도록 하였다. 그대는 옛날 이 마을을 알고 있으니만큼 나를 위해 기문을 써주었으면 한다. 그러면 그것을 금약으로 삼아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제1의 법령으로 삼게 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병을 자주 앓은 탓에 글 짓는 일이 겁이 나서 오래도록 착수하지 못하였다. 그 뒤 조형의 편지가 해마다 대여섯 통씩 왔는데, 회사정 기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임오년(1642년 인조 20년)에 조형이 평시령(平市令)으로 발탁되어 가족을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오자, 손수 회사정의 본말을 기록해 찾아와 날마다 글을 지어달라고 심하게 독촉하기에 내가 그 글을 받아서 다 읽어보았다.”
박미의 회사정기 전문을 읽어보면 조행립이 회사정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태호 조행립은 본래의 터에 회사정을 다시 중건함으로써 구암 임호가 앞서서 이룩해놓았던 여러 가지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호십경을 쓴 백헌 이경석
조행립은 국사암 곁에 있는 집에 살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회사정을 수시로 찾아가 많은 시를 지었다. 그의 문집 ‘태호집’에는 회사정을 주제로 한 시가 수십 편 기록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과의 교류도, 지인들과의 만남도 대부분 회사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회사정을 찾아와 시문을 남겼고, 회사정은 구림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지은 서호십경이 유명한데 회사정 내에 편액으로 걸려 있다. 이경석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이다. 그는 도갑사 도선국사비문을 쓴 인물로 서인 계열의 문인이었다.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 1650~1735)의 ‘서호십경’ 은 이경석의 서호십경을 차운한 시이다. 최규서는 해주인으로 전라도 관찰사와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을 지낸 조선 후기 문신이다. 최규서의 서호십경은 <구림마을 48> 편을 참고하면 된다.
그러면 이경석의 서호십경(西湖十景)을 한글 번역으로 음미해보자.
고산의 눈 속에 핀 매화
작은 산이 마주하는 큰 산 모퉁이에
서호를 두른 고산은 예로부터 불러왔네
눈에 덮여 매화 피어있는 곳 알 수 없지만
그윽한 향기 깨닫고 나니 새봄의 매화로구나
끊어진 다리의 안개 낀 버들
푸른 비단 같은 안개 속에 버들은 길처럼 늘어졌는데
끊어진 다리에 비탈길은 더욱 기이하구나
한가로이 앉아서 꾀꼬리 소리에 귀 기울이니
나귀 타고 눈 밟던 때보다 더한 흥취로세
도갑사의 저문 종소리
죽림 깊은 곳에 솔문이 닫혔는데
호젓한 산사 종소리 저문 산에 들려오네
지친 새 둥지에 들고 사람 소리 조용한데
몇 마디 소리 멀리 백운 사이에서 나오네
대섬의 먼 돛단배
외로운 섬 창연하게 바다 한가운데 엎드렸는데
먼 돛단배 때로 나타나 울창한 수풀을 지나가네
석양에 가랑비 내려 모두가 볼만한데
더욱 사랑스럽게도 가벼운 구름 물가에 그림자 지네
월출봉의 아침 안개
월출산 봉우리에 해는 아직 오르지 않았는데
이른 아침의 안개 푸르스름하게 피어오르네
부는 바람에 날려 잠깐 사이 흩어지니
그림 같은 산의 모습 푸르기가 여러 층이네
용진(龍津)의 저녁 조수
구름 낀 모래사장 넓디넓어 바라보기 아득한데
옛 나루에 자욱한 안개는 조수를 끌어당기네
바닷물 밀려갔다 밀려오길 아침저녁 거듭하고
물에 가득한 그림자 봉우리 어지러이 흔들리네
평호(平湖)의 가을 달빛
맑은 호수에 가을 들어 티끌도 없이 깨끗한데
달은 못 가운데 잠겨 모두가 은빛이로다
십리의 연꽃 어찌 말로 다 이를 수 있으랴
몹시도 사랑스런 달그림자 이때가 새롭구나
원봉(圓峰)의 낙조
층층 산꼭대기 멀리 하늘에 기대어 둥근데
가경을 보려 하니 낙조가 걸려 있구나
한 줄기가 나뉘어져 섬 밖으로 흩어지니
산과 물의 경치 아름다움을 서로 다투네
선암(仙巖)에서 학소리를 듣다
이끼 낀 바위에 남겨진 늙은 신선 이름
고요 속에 때론 학의 울음소리 들려라
좋기도 하여라 맑은 가을 달 밝은 밤이여
어렴풋이 현포에선 신선의 필소리 울리네
향포(香浦)에서 물고기를 구경하다
물기운 무성한 포구가 향기로우니
그물 속에 뛰는 물고기 고깃배에 가득하네
한가롭게 살며 오래도록 호량의 흥취 누리니
가을 바람에 이는 회 생각 도리어 우습구나
<신축년(1661) 늦여름에 백헌(白軒)의 병든 자가 회사정 주인인 조영감 어른을 위하여 20년 전에 말씀하신 것에 부응하여 시를 지어 부친 것이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