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봄에는

2025-03-28     안순희
안 순 희        덕진면 청림길​​​​​​ 시아문학회원

서향 마루 깊숙이 내려앉은 햇살이 작은 새의 깃털에서 반짝거린다. 검은 날개에 흰 배가 까치를 닮았으나 그보다 작아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저 새는 왜 혼자서 우리 집 마루에 날아들었을까? 부르지도 않았는데 와서 햇살이 눈부셔 멍하게 바라보는 내 시선을 붙잡는다. 나처럼 생각 없이 그냥 잠시 멈춘 거라면 목적지는 있는 걸까. 후루룩 날개만 펴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새가 부러운 건지 가여운 건지, 맑은 햇살과 작은 새가 조화로워 무료함을 달래 준다.

지난해 이맘때는 여러 계획으로 설렜다. 봄에 심을 고추와 단 옥수수는 벌써 육묘 준비를 마치고 볍씨도 품종별로 수량을 정해 두었다. 큰 재난 재해 없이 농사를 마무리 짓고 다음 해를 꿈꾸던 초겨울부터 모든 꿈은 멈추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리에 통증이 왔지만 며칠 쉬면 낫겠거니 하다가 걷기가 힘들어져서야 검사를 받아 보니 퇴행성관절염이라고 했다. 지난여름 분수 모르고 함부로 부렸던 값을 치러야 할 차례인가 싶어 모든 계획을 멈추고 온 겨울을 빈둥거렸다. 다음이 있을지 보장은 없지만 일단 다 미루어 두고 치료에만 집중했다.

다행인 것이 조금은 한가한 겨울이어서 편하게 나를 뒤돌아보고 얼마일지 모르는 내게 남은 날들을 그려 보았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했을까? 삶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힘겨운 날들이었을까? 한 번뿐인 인생을 얼마나 충실히 살았을까 라는 물음에 정답은 없었다. 때로는 기쁘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다. 보람도 후회도 부질없지만 내가 꾸렸던 삶이었으니 의미도 있다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주고 나니 마음이 가벼웠다. 사람이란 만능 기계를 갖고 와서 70년을 부렸으면 고장 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열심히 달래고 고쳐는 보겠지만 큰 욕심 없이 순리에 따르자고 생각한다.

인생이 유한한데 욕심은 무한하니 아직도 해 보고 싶은 꿈이 있다. 필생의 꿈이었던 흔적 남기기도 해야 하고 그동안 벌렸던 일의 갈무리도 도와야 하고, 그러나 세상사가 어디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인가. 지난 겨울에 동생이 팔목에 생긴 염증 수술을 받고 잠시 쉬러 왔었다.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성날 수 있으니 절뚝거리며 머리도 감겨 주고 먹을 것도 챙겨 주며 2주 동안 살펴 주었다. 딸 아들이 오라고 해도 형제가 더 편했든지 우리 집에서 지내는 동안 남은 인생의 갈무리를 어떻게 할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에 올라가면 마지막에 연명치료 하지 말라는 유언을 의료기관에서 인증으로 남겨 놓는다며 다 같이 하자고 했다. 누가 먼저 떠난들 억울할 것 없는 나이니 너무 애통해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나이 들고 병이 나니 그렇게 긴 휴가도 누릴 수 있어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염증도 가라앉고 붓기도 빠지니 행동이 많이 가벼워졌다. 몇 차례 성급히 움직였다가 더 악화되어 고생한 후로 설 명절도 간단히 지내고 아이들도 큰딸만 왔다 가고 나니 뜰 안에 잔잔한 평화가 아지랑이 되어 피어오른다. 이제 한 차례만 더 치료받으면 한동안 안 아플 수 있다니 조금만 더 참아야겠다. 일어서지 못해 앉은 걸음으로 방에서만 보낸 세월이 겨울과 함께 지나가고 새봄엔 활동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아파서 누린 한가로움을 즐긴다. 마루에 날아든 새가 부럽기도 하지만 무엇을 전해주러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