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만큼 건강하기

2025-02-21     안순희
안 순 희       덕진면 청림길 

40대 중반쯤이었을까, 무릎이 아파 구부려지지 않아서 한의원에 침 맞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 왜 이렇게 아플까요?”라고 했더니 의사 선생님이 웃으면서 농담처럼 하던 말이 떠올라 가끔 혼자 웃을 때가 있다.

나비는 알만 낳으면 죽고 동물들 중에는 새끼만 낳아 놓고 죽는 것들도 있는데 사람은 20년을 돌봐 줘야 성인이 되므로 자식들 기르라고 오래 사는 것이라며 죽기 위해 서서히 퇴화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내가 아직 젊었기에 쉽게 농담을 한다고 느꼈지만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었다.

세상 모든 생명들이 쓸모가 있을 때까지 살다가 그 역할이 다하면 죽는 것은 자연의 순리여서 아무도 비껴가지 못한다는 것은 알지만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건강을 지키려는 노력은 끝이 없다.

바람 같은 세월을 타고 와 노령 연금을 받는 나이가 되었다. 큰 수술을 했거나 중한 병으로 오래 입원한 일이 없이 오늘까지 살아 있으니 그래도 건강한 축에 든다고 할까? 젊어서야 회복이 빠르고 자신감도 넘쳐서 심하게 몸살이 나도 그것이 몸을 살리는 과정이란 말이 위안이 되었다. 병이 났을 때마다 치료하는 외엔 특별히 건강을 위해 무엇을 해본 기억은 없다. 늘 바빠서 큰 병 날 틈이 없었다고 웃어 보지만 이 나이가 되면 온전한 곳이 없다. 금 간 항아리 다루듯 위태로운데도 오랫동안 조금씩 길들여져서 크게 불편한 줄 모른 채 자연퇴화 과정을 지나고 있다. 세월에서 얻은 지혜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다.

식탁 위에 약봉지가 무거워지니 예전에 노인 돌봄이 하던 시절 방에 약 바구니 보고 놀랐던 생각이 나서 서글퍼진다. 어느 소설의 한 구절인 ‘재 넘어 동네인 줄 알았던’ 그곳에 꿈처럼 내가 서 있다. 어차피 피해 갈 수 없는 숙명 앞에 주눅 들지 않고 의연하고 싶다. 저녁노을이 더 곱듯이 내 인생의 황혼을 아름답게 불태우리라. 제 아무리 근사한 꿈도 그것을 담을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허망할 뿐이고 펄펄 끓는 건강이 있어도 그것을 다스릴 정신이 건전하지 못하면 그 또한 좋은 결과는 기대할 수 없을 테니 분수를 헤아려 모든 일에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건강은 어떠냐’고 물으면 나는 나이만큼 건강하다고 대답한다. 70여 년을 살았으니 웬만큼은 고장 나 있는 것이 정상일 것이고 아무리 어리석어도 그간에 쌓인 지혜가 남았으니 될 일 안 될 일을 구분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유한한 생명을 억지로 연장해 볼 욕심은 헛된 줄 익히 보았기에 남은 인생의 갈무리를 어찌해야 되는 줄은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아직 눈이 어둡지 않으니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써 볼 일이다. 그러다 버거우면 소리로 듣는 공부를 하면 되지 않을까?

살아 있는 동안, 나이만큼만 건강했으면 싶다. 마지막 떠날 때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란다. 다 잃어도 정신 줄만은 꼭 붙들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니 건강 중엔 정신 건강이 으뜸이라고 생각한다.